오늘의 본문은 에스라 9장 9-15절입니다.
에스라는 비록 그들이 노예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셔서 포기하지
않으셨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바사왕의 그들을 향한 태도를 바꾸게 하셔서 그들이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에스라는 비록 그들이 벌을 받고 있지만 그들의 형벌이 저지른 죄보다 가볍다는
것을 알면서도 불신결혼의 죄를 범한 것을 탄식합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남아 피할 자가 없도록 진노하실 것을 염려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서있음을
고백합니다.
방금 CS 루이스의 한 젊은 청년을 풋내기 악마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켜 지옥으로 떨어지게
한다는 내용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을 다시 읽었습니다.(풋내기 악마에게
노회한 스승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인간을 유혹해서 지옥으로 가게 하는 방법을 31통의 편지로
알려주는 내용의 책-역주) 늙고 경험 많은 스크루테이프가 편지에서 그의 제자 악마에게
경고하는 것은 에스라가 그의 기도와 고백에서 보여주는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에스라와 같은 ‘내 형벌이 내 죄보다 가볍다는 태도’를 가진 사람은 절대로 지옥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태도는 무엇일까요? 자신의 죄와 그 죄로 인해 받을 형벌을 분명하게 볼 수 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은 곧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경외의 태도인 것입니다.
에스라의 모든 사람이 함께 저지른 죄에 대한 예민함에 놀라게 됩니다.
그는 가나안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고 그의 딸을 아모리인에게 주지 않았고 또한 아들들을
모아브 여자들에게 장가들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을 고백했지만 그 자신을 역사의
밝고 안전한 순간의 한가운데에서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 남은 자들의 무리 중 한 사람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그러한 태도가 성전 재건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제 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보편적인 영”(인도 힌두교의 브라마)을 향해 가는
것도 엄마가 제 아내의 어머니처럼 고집 세게 예수님 영접을 계속해서 거부한 것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거나 부끄러운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죄와 내 죄가 모두 하나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울과 같은 에스라이 영적 위대함입니다. 바울은 그의 유대인
형제들과 사탄의 사로잡힘에서 새롭게 크리스천이 된 사람들에 대한 애통함이 있었습니다.
내가 아주 조금 인내한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형벌과 고통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죄를 지은 채
하나님 앞에 홀로 서 있습니다. 나의 고통은 내 죄보다 훨씬 더 작습니다. 마치 실제
에펠탑과 기념품으로 파는 모형 에펠탑의 크기 차이와 같습니다.
내가 겪는 고통과 내 죄의 크기 차이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채울 수 있습니다.
오늘 선지자 에스라가 저에게 주는 가르침입니다.
내 고통은 내 죄보다 훨씬 더 작다.
주님. 제가 어떤 사건이나 누군가의 기분 좋지 않은 말 또는 감기에 걸린 일 또는 지하철을 놓친 것,
내 죄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야만 분명하게 그것을 볼 수 있는 다른 수많은 일들을 불평할 때
이 가르침을 날마다 생각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 눈을 내 죄와 주님에게로 돌리게 하셔서 당신에게 닿을 수 있고 살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