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 설교, 찬양을 통해 말씀 앞에 섭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삶을 나누며 함께 성장합니다.
목장 공동체에서 삶을 나누고 말씀으로 세워집니다.
교회와 세상을 섬기며 복음의 사명을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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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 9-18
오늘도 주옥같은 말씀으로 저를 깨우십니다.
그 중에 용서에 대해 묵상하면서
저는 저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기에
남도 용서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했다는 느낌이 잔재해 있었습니다.
항상 왜 이럴까 약간 궁금했지만
궁금해도 살아올 수 있으니 그냥저냥 살아왔습니다.
9월 초의 시험을 앞두고 정신분석 학자마다의
용서의 능력에 대해서도 공부하였습니다.
그중에 하인즈 코헛이란 정신분석가는
[용서는 자기의 상처가 치유되는 데서 얻어지는 산물이다. 그 상처로부터 치유받고 자기에 대한 몰두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질 때에만 그는 진정한 대상관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상호 인정과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한 용서의 삶을 살 수 있다.]
또한 멜라니 클라인이란 정신분석가는
[용서란 대상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것이요, 상호성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용서란 만남이요, 사건이요, 의사소통이요, 은총이지, 의지를 가지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적어도 우리를 공격하는 대상에 대해 똑같은 방식으로 보복하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 자신으로 살아남을 수는 있다. 대상이 이러한 공감능력을 만나고 경험하게 될 때, 그의 투사적 동일시는 차츰 공감능력으로 발달할 수 있게 되고, 대상에 대한 공격충동의 죄책감으로 발달하고, 그 죄책감이 마침내 용서의 능력으로 발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들교회에서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는,
또한 건강한 죄책감을 갖고 자기 죄를 보는,
이 모든 것들은 얼마나 성숙한 것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제 용서의 공부를 하고,
오늘 용서라는 단어를 말씀에서 만나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우리가 하는 용서의 능력이 얼마나 윗 수준인지 깨닫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힘들고, 힘이 빠지며, 기다려야 하고
그래도 안되는 저를 보고 가야 합니다.
적용한답시고 시험공부한 것이 지나쳐
자야 할 시간을 놓치고,
그래서 새벽에 일어나 큐티 할 시간도 놓치고
졸아도 행복했던 그 시간의 기쁨을 놓치고,
엉거주춤 빨리 해버립니다.
언제나 어떤 방식으로든 중독으로 가려는 내 자신을
다시 정비하며, 이 우선순위의 순서가 무너지면
아무것도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며
초심으로 돌아갑니다.
저를 용서하며, 제가 제일 용서 안되는
14년째 별거중인 아이들 아빠..
죄를 보고 있다고 하면서도 그 근저에는
“당신 때문이야”하는 원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저냥 살아가면서
믿음이 조금 생긴 척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용서에 대해서
저 자신을 용서하는 것에 대해서
그를 용서하는 것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겠습니다.
15절.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