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 설교, 찬양을 통해 말씀 앞에 섭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삶을 나누며 함께 성장합니다.
목장 공동체에서 삶을 나누고 말씀으로 세워집니다.
교회와 세상을 섬기며 복음의 사명을 이어갑니다.
우리들교회를 처음 찾은 분의 새로운 시작을 돕습니다.
우리들교회의 비전과 사람들, 채플 소식을 안내합니다.
크리스토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를 봤다. 감동적이었다. 관람후에도 오랫동안 그 감격에 빠져있을 정도로. 나의 감동은 다른 이들과 달리 그 영화에 녹아있는 기독교적 코드 때문이었고, 관람도중 그 코드를 알아보는 재미와 동시에 인간과 세상에 대한 나의 이해가 명작을 통해 공감받는 기쁨으로부터 나온다. 이 영화에서 찾아낸 감동의 보석을 크리스쳔과 나누고 싶어서 미숙한 글을 올린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는 너무나 유명한 고전으로, 오디세우스라는 사람의 고난 극복기나 영웅담으로 알려져왔고 나도 그렇게 알았었다. 그러나 이번에 놀란의 오디세이를 보니 역경 극복기나 영웅기라기 보다는 한 인간의 귀환과 속죄의 서사였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고, 인생이란 어떤 모습이며,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는가, 그리고 마침내 무엇이 되는지에 대한 긴 이야기를 오디세우스라는 사람을 앞세워 보여준다. 1. 오디세우스는 이타카의 왕으로 자타가 인정하는 지혜와 힘의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지혜와 힘으로 신(神)과도 대적할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그가 명분적으로는 빼앗긴 메넬라오스의 아내를 되찾기 위해서 그러나 실제로는 해상 교역의 패권을 장악하기그리스 연합군으로 호기롭게 트로이를 침공하기 위해 전쟁에 나간다. 10년이 가도록 트로이 성은 난공불락이었고 병사들은 점차 지쳐갔다. 그때 오디세우스가 나서서 목마를 고안해내고 그것을 성공적으로 사용하는 계략까지도 내놓아, 트로이를 무너뜨린다. 트로이 목마는 오디세우스의 지혜였고 자긍심이며 자기 부족을 이롭게 하는 선(善)이었다. 이런 오만함으로 꽉차 있었기에 불쌍한 부하 시논을 속여 그를 죽게한 것이나 성안으로 목마를 들여보내기 위해 트로이 사람들을 철저하게 속인 것은 오디세우스에게는 문제가 수 없었다. 성안에 들어가서 그들을 믿어 무방비상태에 있던 트로이 사람들을 학살하고 약탈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자만심으로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의 생각으로 트로이 성 안의 신과 신의 상징들을 거리낌없이 제거해버린다. 트로이 성에서의 사기와 기만, 폭력과 학살, 파괴와 제거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칭송받아 마땅한 영웅적 일들이었다. 그러나 영웅적 행위는 자기를 높혀 영웅의 자리에 앉고 싶은 이기심의 가장된 얼굴이고 그것을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것을 위장술이었음을 오디세우스는 전혀 보지못했다. 게다가 오디세우스는 자기 성공을 위해 "제우스 법"을 폐기한다. "제우스의 법", 즉 크세아니아(Xenia, 환대법)는 자기 땅에 낯선 사람이 들어오거든 어디서 온 누구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해야하는 규범으로, "신의 법"이기에 누구도 어길수 없었다. 오늘 내가 그를 환대하면 어느 날 내가 그의 땅을 지나갈 때 그도 나를 환대할 것이라는 암묵적 약속위에서, 환대법은 부족간의 긴장이 팽팽했던 당시의 사회에서 상호신뢰와 존중 속에서 너와 내가 공존하기 위한 가치와 질서였다. 오디세우스가 이 가치와 질서를 무너뜨린 것이다. "야만의 사회"로 나가는 문을 열어젖힌 것이다. 그 피해는 오디세우스에게도 나타나 귀환의 길에서 오디세이와 부하들은 환대법의 적용을 받지 못해 낯선 이를 만날 때면 매번 칼로 싸우거나 잡아먹힌다. "신이 없으면 무엇이라도 가능한 사회"가 생겨나는 것을 트로이 성을 마구 파괴할 때 그는 알지 못했다. 오만하고 무감각한 그는 그래서 시련과 역경의 긴 여정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다. 2. 먼저 집으로의 귀환이 10년이나 걸리게 된다. 당시 사정으로도 한달이면 갈수 있는 이타카, 즉 집으로의 귀환이 10년이나 걸리게 된 것이다.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열흘이면 갈 가나안땅을 40년이나 걸려가는 것 처럼. 오디세우스에게 집은 자기 정체감이었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인생의 목적이었기에 어떤 상황이나 조건 속에서도 집은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이었다. 인간은 집으로 돌아가야만하는 존재인 것이다. 뿔뿔히 흩어져 개인으로 사는 것이 인생목적이 된 오늘날의 문화에서 "집"이 사람의 목적임을 영화내내 보여주는 놀란은 정말이지 놀랍다. 3. 오디세우스가 집으로 돌아가는 데 이렇게 오래 걸린 첫번째 이유는 오만함이다. 전쟁을 끝내고 귀환 길에 오른 그는 폴리페모스의 섬에 들리게 된다. 흉칙하고 난폭한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의 공격을 자신을 아무것도 아니다(nobody)라고 낮춰 말하여 피할수 있었지만, 그 섬에서 탈출하자마자 그는 쫓아오는 거인을 향해 "누가 네 눈을 멀게했느냐고 묻거든 이타카의 왕, 라에르테스의 아들 오디세우스라고 말하라"고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알린다. 이 오만함은 결국 외눈박이의 아버지 포세이돈의 분노를 사 포세이돈은 오디세이의 항해를 를 험난하고도 길게 만들어버린다. 뿐만 아니라 욕망(탐심)과 쾌락도 귀환이 오래 걸리게한 이유였다. 오디세우스 일행의 여정은 여러번 욕망과 쾌락을 이겨내지 못해 길어지거나 단절된다. 절제력이 부족하여 먹는 것에 탐닉하다가 키르케의 마술에 걸려 돼지가 되고, 탐욕을 이겨내지 못해 아이올로스의 열지 말아야할 주머니를 열어버림으로 거의 다 도착한 이타카에서 튕겨져 나왔으며, 칼립소의 섬에서는 날마다 이타카를 그리워하면서도 로토스(연꽃)가 주는 달콤한 쾌락을 물리치지 못하고 그 섬에서 자그만치 7년이나 머문다. 아무도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는 살아남지 못한다는 경고를 들었음에도 그녀의 아름다운 노래를 듣고싶은 욕망을 이겨내지 못해 세월을 낭비한다. 이렇게 오만함, 욕망과 쾌락으로 인해 오디세우스와 부하들은 쓸데없이 오랜 세월을 바다에서 떠돌아 다니다가 결국 12척의 배에 타고 있던 부하들은 다 죽고 오디세우스 한 사람만 겨우 이타카에 도착한다. 죄의 삯은 사망인것이다. 4. 그러나 잃기만 한것은 아니었다. 얻은 것도 있었는데, 오만했으면 보지 못했을 자기 민낯을 보게 된것이다. 자신의 영웅적 승리를 위해 타인을 이용했음을, 신의 법을 무너뜨려 야만의 시대의 문을 열었음을, 자신의 영웅적 승리는 실제로는 약탈과 파괴의 과정이었음을 알게되었다. 더불어 자신의 내면에 탐욕과 쾌락의 욕구가 있음을 체험했고 그것들을 넘어서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도 체득하여 인간의 이중성이 자기 이야기임을 깨달았다. 자기의 민낯을 대면하였을 뿐 아니라 자기 한계도 깨달은 것이다. 죄에 빠지지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을 돛대에 결박하고 묶인 돛대에서 고통의 절규를 해야할 정도의 고통을 수반하며, 죽은 자의 영령까지도 포함한 타인과 밧줄의 도움없이는 통과할수 없음도 체험했다. 자기 죄를 보게되자 오디세우스는 더이상 저항하지 않고 자기 몸을 편안하게 파도에 맡기게 되고, 그러자 그토록 멀게 느껴졌던 이타카의 집에 도달하게 된다. 5. 이렇게 오디세이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폭력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세상은 왜 파멸에 이르는가 등등을 오디세우스의 귀환 과정을 통해 생생하게 보여준다. 재미있는 것은 영화의 어디에도 기독교적 멘트가 없다는 것이다. 놀란 감독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그는 윈본에는 있는 신들의 개입을 최소화한다. 유일하게 오디세우스를 돕기위해 등장하는 아테나 신도 멀리서 흐릿하고도 미미하게 등장한다. 가능하면 "신들과 신성을 배제해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서라고 한다. 놀란 감독은 신성을 덜어버리고 인간성을 확대하여 오디세우스가 겪는 사건들과 해결방식을 인간의 의지와 고통으로 그려내고자 한다. 그런데도 이 영화에는 기독교적 코드가 넘쳐난다. 비기독교적 서사에 기독교적 서사가 넘쳐남은 기독교적 서사가 기독교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서사일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리라. 암튼 나는 매우 인간적이고 그리이스적이며 크리스토퍼 놀란적인 영화에서 기독교적 코드가 보물섬의 보물처럼 숨겨져있음을 알아챘는데, 그 보물을 찾아내 영화와 공감하고 내 세계관을 확증받는 기쁨과 설레임으로 영화를 봤다. 6.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디세이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놀란의 오디세이에는 신이 없거나 미미하다. 놀란의 영화에서 신은 실재가 아니라 인간 양심의 투영체 또는 상징이다. 놀란의 오디세이는 그런 면에서 인간적이다. 그 결과 놀란의 오디세이는 인간 얼굴의 위장된 민낯을 벗겨버리는 것에는 성공하지만, 죄 문제의 해결은 철저히 인간의 손에 넘긴다. 그래서 고난을 통해 자기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기 힘이 빠진 오디세우스가 구원을 완성하는 방법은 모든 권력을 내려놓고 서쪽으로 떠나는 것이다. 구원을 위해 오디세우스는 유월절 피를 필요로 하지않는다. 죄를 깨달았지만 구원자에 대한 필요는 전혀 느끼지 못한다. 심지어 죄를 반복하고 죄에서 벗어나기가 무척 힘들다는 것을 체험하면서도 죄를 인간 안에서 인간이 해결하려고 한다. 이 한계를 염두에 두고 오디세이를 보면 숨겨져있는 기독교적 코드와 그것을 찾는 것으로 영화는 감동적이며 기쁨이 차오르게 한다. 이런 감동과 기쁨은 놀란 감독의 천재적 감독 능력과 원본 해석 능력, 현실감있게 현실을 보여주기 위한 갖가지의 촬영기술, 그리스 전통 음악까지도 동원한 음향, 기라성같은 배우들의 몸을 던지는 연기 등등이 합해져 관람내내 그리고 관람이후에도 계속된다. 근래 보기드문 대작 ㅡ 오디세이는 볼.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