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8:12-23
12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13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14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
15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고
16 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니
17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
18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19 에베소에 와서 그들을 거기 머물게 하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20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21 작별하여 이르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22 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23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
♱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길 원합니다. 말씀해 주시옵소서. 듣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첫째, 일제히 일어납니다.
오늘 12절에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갔다고 해요. 그 이유가 무엇이죠? 13절에 보니 바울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는 것이에요. 이게 무슨 문제예요? 자신들도 가르치는 내용이잖아요.
이처럼 나를 죽이려고 일제히 덤벼드는 수많은 문제는 사실 대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베스트셀러 <Justice(정의란 무엇인가)>를 쓴 하버드대학교의 교수 마이클 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이라는 책에서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은 능력주의 가치관 때문이라고 하지요. 예를 들어서 엘리트들에게 ‘너의 성공은 네 능력 때문이 아니야’하면 당연히 극심하게 반발하겠죠. 그런데 못 사는 사람에게 ‘니가 못 사는 것은 니가 능력이 없어서야’하면 그들 역시나 반발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좌절과 분노가 승자의 오만과 충돌하면 민주주의 근간인 사회적 연대가 깨진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샌델은 부자와 가난한 자, 여러 계층이 만날 수 있는 광장 같은 공론의 장을 확보해서 거기에서 토론하고 타협하는 것을 배우라고 합니다. 이른바 공동체주의적 공화주의를 주장합니다. 그런데 마이클 샌델은 제아무리 정의와 공정을 주제로 세계적인 정치 철학자가 되었다지만 자기 죄를 모르면 차별 없는 나눔이 안 된다는 것을 간과한 것 같아요.
저는 우리들교회 목장에서 가난하든 부자든 배웠든 못 배웠든 죄가 많든 적든 악하고 음란하든 교양 있고 교만하든 서로의 삶을 나누는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을 공동체주의적 복음주의라고 명명하고 싶어요. 내 죄가 보여 광장에서 함께 나누는 우리들교회 목장 공동체가 정말 세계적인 대안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2억을 빚져서 죽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우리들교회 목장에 와서 보니 막 20억, 70억 빚진 사람들이 목자를 하고 있어요. 배우자의 외도 문자를 보고 막 이혼하고 싶은데 목장에 와보니 비슷한 문제의 사람들이 함께 광장에서 말씀으로 나누는 거예요. 죄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예수님을 만났느냐 못 만났느냐가 문제입니다. 일제히 일어나는 사건 가운데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내 죄를 몰라 맨날 ‘불공정’을 외치며 ‘나는 억울하다’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적용해 보세요.
♱ 온 세상이 일제히 달려들어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문제가 있나요? 그 문제 가운데 내 죄가 보이지 않아서 맨날 남 탓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에게는 말씀으로 서로의 삶을 나누는 복음주의적 공동체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이라면 둘째, 의외의 도움을 받고 구원의 사건이 됩니다.
14절에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바울을 대신해서 갈리오가 나섭니다. 그리고 15절에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언어란 말씀을 의미하고 명칭은 예수를 메시아 또는 그리스도로 부르는 것입니다. ‘너희 법’은 물론 율법을 의미하지요. 그러니 이게 갈리오 총독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유대의 문제는 너희가 알아서 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매 맞고 쫓겨나기도 하고 또 옥에 갇히기도 했는데 이번엔 무죄 판결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매 맞고 쫓겨나는 것은 저주이고 무죄는 축복인가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세팅 속에 하나님의 계획대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맨날 세상 언어와 명칭과 법에 집착합니다. 언어 하나에 상처받아 이혼하고 명칭 하나 때문에 불공정하다고 생각하고 법 하나에 나는 억울하다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억울해도 내 생각을 죽이고 내 자아를 죽이고 내 입을 닫으면 이때부터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모든 문제에 성령께서 개입하시고 해결해 주십니다.
그런데 17절에 모든 사람은 왜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렸을까요? 바울에 대한 고소가 기각되니 그 책임을 회당장에게 물은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장 1절에 보면 이 소스데네가 바울의 최고 동역자가 된 것을 알 수 있어요. 동족들에게 매 맞은 사건이 심판의 사건이 아니라 구원의 사건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 집에서나 어디서나 어떤 언어와 명칭과 법에 뒤집어지나요? 구원을 위해 입을 닫은 적이 있나요? 그러므로 의외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이라면 셋째, 작별을 잘하게 하십니다.
18절에 보니 바울은 ‘형제들과 작별하고’ 수리아로 떠나갑니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에 여러 날 머물면서 아굴라 부부와 함께 일하는 동안 그 아내의 믿음이 더 좋아진 모양이에요. 오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로 그 칭호가 바뀌어져 있네요.
그리고 바울이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고 하는데 머리 깎는 일이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성경은 이렇게 기록했을까요? 다 이유가 있지요. 민수기 6장 18절에 보면 ‘자기의 몸을 구별한 나실인은 회막문에서 자기의 머리털을 밀고 그것을 화목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둘지며’라고 하였지요. 화목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제사죠. 그러므로 바울이 오늘 머리를 깎으며 서원한 것은 그동안 자신을 지켜주신 것에 감사하고 복음의 사도로서 더욱 구별되고자 자기를 부인하는 자발적 서원입니다.
20절 이후를 보니 바울은 에베소와 가이사랴, 안디옥과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닙니다. 작별의 연속이에요. 그러나 그 작별의 결론은 23절에서 보듯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입니다. 인간의 작별은 끝남과 마지막이지만 성령의 작별은 새로운 사명의 시작이지요. 하나님의 뜻대로 가는 것이며 영혼 구원이 목적입니다.
내 언어와 생각대로 판단한 것이 남편을 무시하고 질서를 깨뜨린 죄임을 깨닫고 이제는 아내의 자리를 잘 지키겠다는 한 성도님의 큐티인 묵상 간증이에요.
“저는 남편을 교회에 데려와 양육 훈련을 받게 한 뒤 성경책에 손을 얹고 결혼했어요. 하지만 남편을 저의 머리로 삼지도, 질서에 순종하지도 못했어요. 집안일도 나의 법대로 하고 ‘지금 당장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와줘요’라고 하면 남편은 바로 움직여야 했죠.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이것도 못해줘?’하며 남편을 대적했어요. 남편은 저와 말이 안 통해 자주 술을 마시고 상을 쾅쾅 내리쳤어요. 하루는 제가 그런 남편의 모습에 욱해서 욕하며 상을 엎고 함께 육탄전을 벌이기도 했어요. 그 후 저는 여자 소그룹 모임에서 이 일을 무용담처럼 웃으며 이야기했어요. 그러자 저희 모임에 탐방을 오신 교회 리더분은 ‘남편의 질서에 순종이 안 되시네요’라며 남편에게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말씀하셨어요. 저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소그룹 리더와 지체들의 진심 어린 조언에 그동안 남편을 무시한 저의 교만을 깨닫고 남편에게 무릎 꿇고 사과했어요. 이렇게 저는 12절 말씀에 유대인처럼 ‘일제히 일어나’ 분을 쏟아내며 불공정과 억울함을 외치는 죄인이에요. 그럼에도 부부 갈등의 문제를 성령의 문제로 해석받아 저의 교만을 회개하고 남편 말에 귀 기울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려요. 이제는 어떤 문제가 찾아와도 남편을 무시하는 저의 악과 먼저 작별하여 아내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길 원해요. 저의 적용은 남편의 의견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게 아니고’ 하지 않고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는구나’라는 수용의 언어를 쓰겠습니다. 남편에게 집안일을 부탁한 뒤 바로 하지 않아도 화내지 않고 기다리겠습니다입니다.”
우리가 전도하다 보면 일제히 끊임없이 문제가 일어나서 나를 공격합니다. 그러나 그 문제 속에서 완악한 나 자신을 보게 되면 성령의 도우심으로 구원의 사건이 됩니다. 세상 것과 작별을 잘하고 모든 세상 문제를 성령께 토스하면 성령께서 온 힘을 다해 우리를 효과적으로 도우실 것입니다.
♱ 기도 드립니다.
주님, 일제히 일어나는 문제 속에서 저희의 죄가 보이지 않으니 날마다 집안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언어와 명칭과 법에 관한 것으로 싸움을 일으킵니다. 이제는 구원을 위해 욕심과 교만, 인정 중독과 술과 게임, 음란과 쇼핑 등으로부터 작별하길 원합니다. 나의 악을 작별할 때 이것이 성령의 작별이 될 줄 믿습니다. 내 죄를 보는 공동체만이 공정하다고 하시니 이 복음주의 공동체에 잘 붙어가길 원합니다. 인생의 문제들 가운데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뜻이 우리 삶 가운데 이루어지도록 역사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