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4:1-7
1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2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4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5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6 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7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
하나님 아버지, 모욕과 쫓김을 당해도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길 원합니다. 말씀해 주시옵소서. 듣겠습니다.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려면 첫째, 여전한 방식이 중요합니다.
1절에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고 합니다.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갔다는 말은 여전한 방식이라는 뜻이 있어요. 만일 완악한 동족을 향해 감정만 앞세웠다면 그렇게 하지 못했겠지요. 하지만 이들은 구원을 위한 사명에 충성했기에 여전한 방식으로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어요. 그러자 이고니온 회당에 모인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의 큰 무리가 믿게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영혼 구원의 열매는 고난 가운데서도 내가 말씀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길로 놓는 여전한 방식으로 살아갈 때 주께서 맺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때마다 여전한 방식은 진리 중의 진리입니다.
2절에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이라고 해요. 허다한 무리가 믿게 되니 또 유대인 지도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의 시기가 발전해서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는 다른 형태로 나타납니다. 누구를 향해 악한 마음을 품게 하는 것은 결국 그 영혼을 해하고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무섭게 들리는 이 복음을 듣고도 이방인의 허다한 무리가 믿게 되니 유대인들은 기가 막힐 노릇이죠. 그러니 교묘한 말로 그들을 선동합니다. 권력으로 죄인도 의인 되게 하고 의인도 죄인이 되게 선동하는 것이 이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이에요. 적용 질문 드릴게요.
♱ 나를 향해 악감을 품게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그 사람을 위해 내가 오늘도 여전한 방식으로 행해야 할 십자가를 길로 놓는 적용은 무엇인가요?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려면 둘째,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3절에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라고 해요. 두 사도가 이고니온에서는 안디옥에서와는 달리 오래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하루를 머물러도 충분할 수 있지만 1달 혹은 1년 동안 오래 머물러도 부족할 수 있습니다. 적대적인 상황 속에서도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최적의 시간인 카이로스가 올 때까지 복음 전파를 위해 주어진 자리를 지키며 사명을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이들은 오래 머물렀을까요? 바로 양육을 위해서입니다. 수리아 안디옥에서도 1년 동안 가르치니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았다고 했죠. 바울의 선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를 말하라면 그것은 바로 양육입니다. 전도의 완성은 양육이에요. 에베소에서는 두 해를 가르쳤고 고린도에서는 1년 6개월을 가르쳤어요. 말씀을 제대로 배워야 온전한 신앙인으로 설 수 있습니다. 그렇게 양육이 없는 전도는 미완의 전도입니다.
두 사도는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하게 전했다고 해요. 이 말씀인즉 내 몸으로 사명의 자리를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비비고 닳도록 문지르는 듯이 수고하며 살아낼 때 예수님이 친히 표적과 기사로 은혜의 말씀, 구원의 말씀을 증언하신다는 거예요. 즉 구원을 위해 내가 해야 할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만 힘입게 하는 오늘 내 환경이 바로 주께서 허락하신 최선의 세팅이에요. 어떤 환경에서도 여전한 방식으로 말씀을 묵상하면서 비비고 닳도록 적용하며 사는 것이 표적과 기사가 되어 최고의 증언을 해줍니다.
4절에 그 시내에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고 해요. 악하고 음란한 세상에 주님이 직접 증언하시는 능력의 말씀이 전해지니 오히려 편이 갈립니다. 사도들과 함께 주님 편에 서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그들을 대적하는 대적자와 한편이 되는 사람들도 있어요. 이것이 정상이에요. 사람들이 복음을 영접함으로 자기 백성을 뺏긴 사탄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이미 자기 백성으로 확정된 이들을 동원해요. 그렇다고 우리가 저들의 비난과 박해가 두려워 다시 어둠의 권세 아래로 굴복해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일생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했지요. 악하고 음란한 세상에서 좋은 게 좋은 것이다라는 말이 통하는 복음은 없어요. 구원을 위해 말씀을 기준으로 놓고 거짓 화평이 깨지는 고난을 감당하며 죄를 깨달아 회개하면 주님이 참된 화평을 주십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지체들과 함께해야 합니다. 말씀의 공동체에 붙어 있어야 해요. 미리 이렇게 양육이 되어야 어떤 일이 와도 놀라지 않는 것이죠. 여러분은 어떠세요?
♱ 복음을 위해 내가 오랫동안 머물러 있어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수치를 무릅쓰고 도망가듯 피해야 할 곳은 또 어디입니까? 교회의 양육 훈련을 잘 받고 있나요?
큐티하는 공동체에 속해 말씀을 들으면서 지금껏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며 교회를 옮긴 교만과 이기심을 회개하게 되었다는 한 성도님의 큐티인 묵상 간증이에요.
저는 결혼한 지 15년 만에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었지만 영적 처소인 교회를 정하지 못하고 여러 문제로 이곳저곳 옮겨 다녔어요. 알 수 없는 공허함과 말씀에 대한 갈급함을 느끼던 중 큐티하는 교회 공동체에 속해 말씀을 묵상하며 삶을 해석받았지요. 그러자 공허하고 갈급하던 마음이 평안과 기쁨으로 채워졌어요. 하루는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직장 후배에게 공동체를 소개하며 와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러자 후배는 언니는 교회를 왜 그렇게 많이 옮겨 다녔어?라고 물었지요. 저는 큐티하며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했어요. 그러자 지금까지 공동체를 섬겼어도 문제가 생길 때마다 제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다가 공동체를 탓하며 떠났다는 것이 깨달아져 회개했습니다. 3절에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에서 오래 머무르며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한 것처럼 지금은 교회 소그룹 리더로 주의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고 있어요. 그러자 20년간 교회를 떠났던 조카가 이혼을 말리는 사람이 이모밖에 없다고 하는 일도 생겼지요. 예배의 자리로 인도된 조카는 현재 공동체에 속해 말씀으로 위로받으며 고난을 통과하고 있어요. 저의 교만과 이기심을 깨닫게 하시고 조카까지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려요. 앞으로도 사명의 자리를 잘 지키고 구원을 위해 인내하기를 기도해요. 저의 적용은 저와 성향이 다른 남편과 자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공동체에 묻고 기도하며 기다리겠습니다. 말씀을 전할 때 내 생각으로 가감하지 않고 그대로 전하겠습니다입니다.
5절에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라고 해요.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도 합세해서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듭니다. 아주 조직적이에요. 6절에 그들이 알고 도망하여라고 해요. 안디옥에서는 쫓겨나고 이고니온에서는 생명의 위협을 느껴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구원을 위해서 옥문이 열려도 도망을 안 갈 수도 있지만 오늘처럼 또 사명을 위해 수치를 무릅쓰고 도망가듯 몸을 피해야 하는 경우도 있어요. 여전한 방식으로 말씀을 묵상하지 않으면 이것을 분별할 수가 없지요. 바울은 이런 박해 속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계속 전도를 했어요. 6절과 7절에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하잖아요. 배척과 박해, 이게 죽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이런 육체적인 고초와 정신적인 괴로움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복음전도는 외로운 길입니다. 슬픈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삶을 가장 귀하게 보십니다. 정말 영적 진실성의 결론은 인내가 맞습니다.
♱ 기도 드립니다.
주님,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는 것이 저희에게 왜 그리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여전한 방식으로 주 앞에 서는 것도 잘 되지가 않습니다. 십자가를 길로 놓고 가는 것은 짐처럼 여겨집니다. 내게 악감을 품는 사람을 주의 사랑으로 품어주는 것도 남 얘기 같습니다. 이게 다 양육이 덜 되었다는 증거임을 고백합니다. 주님, 오늘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여전한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을 보았습니다. 그만큼까지 따라갈 수는 없더라도 힘든 이 상황에서 오늘 하루 큐티책을 펴고 몸을 움직여 잘 먹고 잘 자는 일상을 여전한 방식으로 잘 살아내길 원합니다. 공동체를 붙들고 지체들과 함께하며 주님만 힘 있게 하는 이 상황을 잘 통과할 수 있도록 저희를 붙잡아 주시옵소서. 그것이 내 삶으로 전하는 복음임을 깨닫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