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tro |교회 개척, 희망을 말한다 김양재 목사
우리들교회 담임목사
인터뷰를 위해 방문한 우리들교회 사무실에서는 쉴새 없이 농구공 튀는 소리가 들렸다. 휘문고등학교 체육관을 빌려 예배를 드린지 7년. 그 사이 우리들교회는 5,000명이 넘는 성도들이 삶을 나누고 교제하며 놀랍게 성장해 왔다. 김양재 목사를 만나 우리들교회의 개척에서 지금까지의 사역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편집부>
지난 2002년 개척된 우리들교회는 개척 7년 만에 5,500명의 성도가 모이는 교회로 성장했다. 여느 교회처럼 번듯한 건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유명한 목회자가 세운 것도 아니고, 대형교회의 지원을 받았던 것도 아닌데 개척 이후 이토록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우리들교회의 개척 이야기를 할 때 김양재 목사의 개인적인 삶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를 개척하기 전에도 이미 큐티선교회를 통해 평신도 사역자로서 활발하게 사역을 하고 있었던 김양재 목사는 오랜 시간동안 말씀묵상을 하면서 얻었던 영혼구원에 대한 사명감과 불신자들을 향한 애통한 마음이 커져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또한 교회를 다녀도 그리스도 밖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사람들이 얼마나 말씀에 갈급한가 보게 되면서 교회 개척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게 되었다. 큐티 모임을 통해 주중에 모이는 사람들은 이미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다보니 불신자에게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말씀을 나누는 건강한 문화 공동체의 필요성 또한 절감하게 되었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던 젊은 과부이자 평신도였던 제가, 삶 가운데 말씀을 통해 얻은 은혜를 나누기 시작했어요. 시장에서도 교회에서도 구역장으로 교사로 쉼 없이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 다른 사람들이 돌보지 않는 재수생들을 모아서 큐티모임을 하면서 사람들이 얼마나 말씀에 갈급한지 또 어떻게 삶이 변화되는지 목도하게 된 것이죠.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매일 10개가 넘는 소그룹 모임을 인도하면서 사람들의 필요를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평신도 시절부터 말씀묵상을 하면서 얻었던 영혼 구원에 대한 사명감과 불신자들을 향한 애통한 마음이 커져가면서 말씀을 읽고 깨닫고 적용할 수 있는 공동체를 소망하게 된 것이다. 막상 교회를 개척하기로 했지만, 개척 준비가 쉽지만은 않았다. 처음에는 김양재 목사의 집에서 12가정의 스탭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지만 어느새 1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다. 주일이 되면 주차와 사람들의 왕래로 이웃들의 눈치를 보게 되었고, 결국 마음 놓고 예배드릴 수 있는 공간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우리들교회는 현재 휘문고등학교 대강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성전 건축을 하지 않고 학교에서 예배를 드리겠다는 다짐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거창한 슬로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들교회를 이끌어 오셨다. 학교에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은 당장의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별도의 준비나 든든한 개척자금 없이 시작한 개척 교회가 큰 예배당을 얻기란 요원한 것이 현실. 김양재 목사도 100명 정도의 성도들이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공간을 얻기 위해 수많은 미션스쿨의 문을 두드려보기도 하고 상가를 얻기 위해 수없이 발품을 팔아도 보았지만 다 거절 당하는 경험을 했다. 그러던 중 휘문고등학교에서 식당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 해주면서 바로 자리를 옮겨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미션스쿨도 아닌 일반 고등학교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사역의 선을 명확하게 그어놓는 핸디캡이 되기도 했다. 우리들교회는 일반 학교를 빌려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대부분의 교회가 하는 새벽기도, 철야예배, 주중 성경공부가 불가능한 상태다. 지난 7년 동안 그 흔한 특별새벽기도회나 부흥회 한번 해보지 못했다. 김양재 목사는 교회에 어떤 프로그램도 없고 이벤트도 없고 오직 주일예배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저절로 큐티 목회가 자리 잡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공부도 스스로 하는 사람이 잘 한다고, 교회에 프로그램이 전혀 없다보니 교인들도 말씀을 보지 않으면 스스로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온 교인이 큐티하고 그것을 나누는 것이 우리들교회만의 특징이자 유일한 프로그램인 셈이다. 이는 다시 평신도들의 활발한 사역 참여로 이어진다. 우리들교회는 현재 성도가 5,500명에 달하지만 전임 사역자는 2명 뿐이다. 부족한 부분은 목장에서 헌신하는 평신도 사역자들의 몫이다.
김양재 목사는 환경이 갖춰졌다면 우리들교회 역시 여느 교회처럼 다양한 프로그램을 시행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큐티 밖에 없는 교회는 정말 없으리라 생각하는데, 저도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다면 다 했을거에요. 하나님이 말씀만 가지고도 교회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려고 일부러 막으신 것 같기도 해요.”
말씀을 나누는 것이 생활화되어서일까. 우리들교회의 예배, 공동체 고백을 보면 성도들이 자신의 죄와 치부마저도 너무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김양재 목사의 목회 스타일에서 기인한 것이다. 김 목사 스스로도 삶 가운데 많은 고난을 겪었고, 또 그런 개인적인 이야기를 성도들에게 솔직하게 나누고, 말씀 가운데 적용하며 살아났던 경험들을 과감하게 나눈다. 결혼 이후 외출조차 마음 놓고 하지 못한 채 걸레를 손에서 놓지 못했던 그녀의 삶의 이야기가 성도들의 마음과 삶을 오픈하게 도와준 것이다.
“저 스스로 모든 교양을 내려놓고 이야기하게 되니까 성도들도 본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들교회를 일명 목욕탕 교회라고 합니다. 서로 발가벗고 때를 밀어주는 거에요. 내가 벗고 있으니까 사람들의 때를 밀어줄 수 있고, 또 굉장히 친밀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진솔한 교제가 일어나면서 우리들교회는 저절로 보혈의 공동체, 피의 공동체로서 견고하게 다져지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사역의 열매만을 놓고 보면 개척 목회가 무척이나 수월했을 것만 같다. 그러나 대한민국 수도 서울, 그것도 강남 한복판에서 여성 목회자로 교회를 이끌어간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터. 목회 자체가 어려운 오늘날 현실에서 여성 목회자라는 또 하나의 타이틀은 김양재 목사의 사역에서 또 하나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김양재 목사의 이름을 보고 남성 목회자라 생각해 전도에 응했던 사람들 중에서 담임 목사가 여성인 것을 알고 교회 문 앞에서 되돌아가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그러나 김 목사는 여성이기 때문에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때문에 목회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여성 목회자로서의 한계를 잊고 산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냉난방도 되지 않는 학교 체육관에 매주 토요일마다 예배를 위해 의자를 놓고, 카펫을 깔고 셋팅을 하고 또 이것을 주일이면 다시 치워야하는 우리들교회의 환경은 놀라운 부흥과 성장 뒤에 숨겨진 비하인드 스토리기도 하다.
“어디나 다 어려운 점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잖아요. 그 정도로 낮아지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던 것처럼 교회도 어려운 것들을 이겨내야 겠지요. 저희는 지금까지 우리들교회 간판도 못 달고, 한 번도 교회를 알리는 광고 전단지를 뿌려보지도 못했어요. 학교이고 또 이곳이 미션스쿨이 아니라 마땅한 장소가 없어서 그 흔한 특별새벽기도회나 부흥회 한 번도 못했어요. 아파트촌도 아니고 관공서와 사무실이 밀집된 곳이라 주일이면 사람을 구경할 수 없는 이곳에서 여성 목사, 그것도 할머니 목사가 이렇게 사역을 했다면 누구든지 할 수 있다는 이야기죠. 누구든지 할 수 있지만 또 누구나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야망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영혼 구원에 대한 애통함과 소망과 사명이 있어야 하고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더욱 깨닫게 됩니다”
김양재 목사
서울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했으며 서울예고와 총신대 강사를 지냈다. 독실한 크리스천 가정에서 성장해 여러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믿는 집안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으나 고된 시집살이 끝에 마음의 병, 육신의 병을 앓게 되었다. 그러던 중 큐티를 통해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하면서 삶이 변화되었다. 남편의 죽음을 계기로 평신도 큐티 사역자의 길로 들어서 큐티선교회를 이끌어 오다가 현재 우리들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큐티를 하면서 얻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저술한 「날마다 큐티하는 여자」, 「큐티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가정아 기뻐하라」 등 여러 권의 저서들이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월간 교회성장 2010년 7월호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