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말함]
행22:1~8
바울이 성령의 허락을 받기 위해 구원의 언어를 쓰는 것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자기 죄를 깨달으면 인생에 눈이 떠지고 신세계가 열리는데, 그 경험이 놀라워서 한 번만 말할 기회를 달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말함이고 간증이며 사명의 인생입니다. 오늘은 성령의 말함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내 자랑이 아니라 우리를 대표하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교리이론이 아닌 단순하게 나로 시작하면서 말씀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간증을 하는데, 이것이 곧 성령의 말함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섯 가지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여러 사람이 바울을 민족의 원수, 배신자, 반역자로 보지만 사실은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부유한 교육의 도시인 길리기아 다소 출생이고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이는 바벨론이나 앗수르 포로로 갔다가 흩어졌던 유대인을 말합니다. 셋째는 예루살렘 성에서 자랐기에 유대인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넷째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다고 합니다. 가말리엘은 당시 유대인들이 인정하고 존경했던 인물로, 이는 바울이 율법 박사라는 뜻입니다. 다섯째는 이 대단한 배경을 갖고 자신도 하나님에 대하여 열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소개는 바울의 자랑이 아니라 자신도 청중들 모두와 똑같다는 것입니다. 세상 자랑으로 간증을 채우면 자기와 듣는 청중을 분리하는 함정에 빠지는데, 성령의 말함으로 하면 청중과 자신을 같은 입장에 놓으며 분리시키지 않습니다. 죄인 된 모습을 내가 대표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존적 교만함 때문에 죄고백도 자랑으로 흘러가기 쉽기에 내 간증의 목적이 구원에 있는지 늘 생각하며 기도하며 나눠야 합니다.
둘째, 내 죄가 내 고난보다 더 크다는 고백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죄보다 고난을 더 크고 무겁게 여겼다면, 3차 선교여행까지 하며 많은 교회를 개척한 자신에게 어떻게 이런 결박과 환란을 줄 수 있나, 또 예루살렘 교회 유대인들이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가 있냐고 반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바울이 된 후, 자기가 선한 일인 줄 알고 행했던 일들이 주님의 도를 박해하고 사람을 죽이고 선량한 남녀를 결박해 옥에 넘기는 등 죄를 지은 것임 깨닫고 유대인 군중 앞에서 죄고백을 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말함, 성령의 간증입니다. 이렇게 고난보다 더 큰 내 죄를 깨닫고 고난을 고백하는 성령의 말함은 감동과 은혜를 주지만, 고난만 강조하면 결국은 내 자랑과 다름이 없습니다. 내 죄악의 크기를 깨달은 만큼, 간증은 성령의 말함이 됩니다. 따라서 끊임없이 찾아오는 고난에는 자존적 존재가 되려는 우리를 회개하고 돌이키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와 날마다 내 죄와 싸우는 영적 전쟁 없이는 예수님을 의지하고 구원의 길을 걸어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으로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하는 존재로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할 때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는 흔들어 깨우는 손, 때려서 깨우는 손, 멈추어 세우는 손, 잡아당겨 끌어오는 손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셋째, 엎드러져 들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박해자인 바울이 어떻게 죄를 보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9장의 간증에는 없었던 오정이라는 시간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큰 빛이 둘러 비쳤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정오의 빛은 용광로 불같아서 그걸 보면 진짜 눈이 먼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정오의 빛보다 더 밝은 빛, 예수님의 영광의 큰 빛이 사울에게 비추어진 것입니다. 주님은 생명의 빛으로, 광채를 넘어 사람이 보면 죽는 빛입니다. 홀연히 해가 비쳐서 죽을 것 같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앞으로도 뒤로도 못 가는 상황, 기세등등했던 바울이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을 맞닥뜨린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엎드러지니까 말씀이 들리고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내 생각과 가증이 땅에 엎드러지는 사건을 통해서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내 입술을 통해 성령의 말을 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또한 기세등등한 사울의 이름을 이름을 두 번 부르시며 전적인 은혜로 사명을 주십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표현은 사도행전과 바울의 간증에서만 나옵니다. 당시 구약을 잘 알던 사람들의 인식 속에 나사렛은 버림받고 가난하고 소외되고 저주받은 땅을 통칭합니다. 가불 땅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마치고 두로 왕 히람에게 준 땅인데 그가 쓸모없다고 받지 않아 버림받아 도로 돌아온 곳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가치 없고 저주받은 땅에서 예수님이 나셨습니다. 성령의 말함은 엎드러지는 축복 속에서 나사렛 예수를 만나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내를 팔아먹은 아브라함, 잘난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 에서가 아닌 속이는 자 야곱, 총리 요셉이 아닌 며느리와 동침한 유다, 간음과 살인죄를 지은 다윗, 이방 여인들과 창기들의 계보 속에서 여인의 자궁에 점으로 비천하게 오신 이 나사렛 예수를 만나는 것이 구속사의 정점입니다. 그런데 엎드러져지니 바울에게 이 구속사가 들린 것입니다. 성령의 말함을 아는 자들은 자신의 죄성의 깊이를 깨닫고 점으로 오신 나사렛 예수를 만나 구속사를 알아듣게 됩니다. 내가 죄인인 사람은 인간관계가 나쁠 수가 없습니다. 사도행전을 선교하는 책으로만 알지만, 선교는 바로 나와 우리 가정이 변하는 것입니다.
취학부서 큐티 페스티벌 간증 시간에 한 아이가 엄마와 아빠가 안 싸웠으면 좋겠다는 나눔을 했습니다. 그 아버지는 자신이 아내를 더 때리지 않기 위해 수치를 무릅쓰고 고백한다고, 아내 집사님도 수치와 두려움에 대해 고백했습니다. 이에 대해 모두 크게 손뼉을 쳐주며 이 가족을 격려해 주었는데, 정말 우리들 공동체 최고입니다. 오늘 주보 청년부 간증에 어쩌다 한번 죄지은 사람에서 죄인으로 바뀐 청년을 소개했습니다. 이 청년은 결혼식 당일 파혼한 사건이 해석이 안 되어서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목자가 된 그 청년이 목원을 상담하다가 어학연수 가서 유부녀를 만난 사건을 공개하면서 본인의 죄를 드러냈습니다. 앞으로 이 죄고백으로 자유로움을 얻고 많은 사람을 살릴 것이라 믿습니다. 성령님께서 도와주셔서 우리 모두 처절하게 내 죄를 깨달아 죄인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묵묵히 걸어가는 바울처럼 끝까지 성령의 말을 하고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