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실상]
행 21:27~36
오늘 성령의 실상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그래서 기다려야 합니다. 반드시 드러나게 하십니다.
그 이레가 차매(27절)는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려야 된다는 뜻입니다. 7은 완전 수입니다. 그런데 그 이레가 거의 찼을 때, 불청객이 성전에 들어옵니다.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아시아의 수도,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도 절기를 지키려고 성전에 들어와 있는데 성전에서 바울을 보자 눈이 뒤집혔습니다. 그들 입장에서 바울은 자기들의 공동체를 깨트린 원수였습니다. 그리고는 무슨 큰 범죄를 목격한 사람처럼 큰소리로 외칩니다. 자기들을 도우라고 외칩니다. 자기들이 붙들고 있는 이 사람은 유대인의 율법과 성전을 비방하는 가르침을 퍼트리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또라고 시작하며 결정적인 죄목을 만들어냅니다(28절). 죄목의 이유는, 한때 자기들과 같은 에베소회의 당원이었다가 바울을 따라 두란노 서원으로 떠난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헌금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시내에서 바울과 함께 있는 것을 봤는데, 성전에서 바울을 보니 드로비모가 성전 안뜰에 들어왔다고 가짜 뉴스를 확신하며 퍼트린 것입니다. 이 말이 성전에 모인 유대인들의 귀에 딱 꽂혔습니다. 바울이 모세의 결례를 철저히 지켜서 할 말이 없었는데, 책을 잡으니 바울 주변으로 몰려 들어와서 분노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드로비모를 데리고 온 적이 없었습니다. 바울이라는 존재가 편견 가득한 유대인 군중 앞에 순간적으로 드러났습니다. 바울의 모습과 사역이 유대인의 고정관념과는 너무 다르다는 실상을 하나님이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시간, 예상치 못했던 그 시간, 카이로스에 성령께서 드러나게 하십니다. 장로들의 실상과 바울을 통한 하나님의 실상이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둘째, 피해 의식에 사로잡히면 실상을 볼 수가 없습니다.
온 유대인들이 호기심에 몰려온 것이 아니라 바울을 향한 비난에 동의하면서 미움과 분노가 활활 불타올랐습니다(30-31절). 한 무리로 똘똘 뭉쳐서 돌진해 와서는 바울을 잡아서 성전 안뜰에서 바깥으로 끌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문을 딱 닫았습니다. 여기서 죽이면 그 피가 성전을 더럽히기 때문에 끌고 나가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성전의 기물이 훨씬 중요하고 사람의 생명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이 결벽증 같은 배타성은 피해 의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잘못이 없는데 피해만 받았다면서 피해 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은 존재 자체로 가해자입니다. 그런데 그 가해자가 자기와 똑같이 하나님 백성이 되는 길이 있다하고, 그것을 전하는 바울이 있다고 하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자신들이 그 역경 속에서도 잃어버리지 않고 힘들게 지켜온 전통을 지키지 않아도 하나님 백성이 된다고 하니 살려 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전 문이 굳게 닫히고 바울이 끌려간 곳은 바로 성전 밖입니다. 그때 당시 기득권과 선민의식으로 가득 차 있던 사회에서 이방인은 결코 들어가지 못하는 성전이 아닌 바로 성전 바깥, 이곳은 바로 스데반이 유대인들과 바울에 의해 돌로 쳐 죽임을 당한 장소였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 내가 이렇게 결박을 당해 죽어도 아무 할 말이 없다는 그 자리까지 내려갔습니다. 바울은 스데반을 생각하며 내가 똑같은 고난을 지금 받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그들을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실상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 바울은 어떤 것도 묵묵히 받아들였습니다.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실상과 성령님의 실상이 드러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한 사람을 잡아 죽이려 하던 그들이 정작 자기보다 힘센 존재가 나타나니까 하던 일을 딱 멈춥니다(31-32절). 천부장은 로마 장군의 계급으로 천명의 군사를 통솔하는 장교입니다. 천부장이 자기 휘하의 병사들을 끌고 도착하니 바울을 그렇게 잡아 죽이려던 유대인들이 딱 겁을 먹고 폭행을 멈추었습니다. 피해 의식에 갇혀 있으니까 약자에게는 무서운 화를 쏟아내며 괴롭히고, 강자에게는 눈치를 보고 겁을 먹으며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셋째, 미리 들은 말씀으로 나의 결박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병사들에 의해 문자 그대로 양쪽에서 쇠사슬로 단단히 묶였습니다(33절). 이것은 난폭하고 거친 사람을 다룰 때 사용하는 쇠사슬로 완전히 정식 죄인으로 결박을 당한 것입니다. 보통 죄인 말고 정식 죄인, 이것이 축복입니다. 그래서 결국 로마로 가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오는 길에 성령께서 각 성에서 바울에게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결박을 당하니 놀라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33-34절). 저항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천부장이 누구이며 무슨 죄를 지었냐 물었습니다. 바울은 로마로 갈 때 가장 안전한 방법이 내가 죄인임을 알고 죄인의 신분으로 결박을 당해 가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내가 죄인임을 알고 죄인 된 신분으로 결박을 당해 가면 그것이 가장 천국을 가는 지름길이라는 것이 성령의 실상입니다. 그런데 무리는 죄를 모르니 저마다 이말 저말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니 천부장이 실상을 알 수 없었습니다. 죄 없는 사람들이 하는 일은 늘 그렇게 소리를 지릅니다. 그리고 미워하는 사람은 계속 미워합니다(35-36절). 없이하자는 예수님을 죽이라고 할 때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누가는 그 동일한 단어를 쓰면서 스데반을 넘어 바울과 예수님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온 도시가 소동할 만큼 놀라도 주께서 미리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떨어지지 않도록 붙들고 계심으로 담대하게 통과하며 주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지도록 성령께서 효과적으로 도와주시는 것이 성령의 실상입니다.
가족 간의 싸움의 실상이 성령의 실상으로 변한 한 집사님의 고백입니다. 둘째 딸아이 생일이었는데 밥을 먹고, 촛불도 불고, 막내가 오랜 시간 준비한 공연도 보고 파티가 분위기 좋게 끝났습니다. 그런데 큰 아이가 노래를 불러준다고 해서 노래를 하는데, 엄마와 딸이 너무 감동을 하여서 각자 핸드폰으로 찍고 앙코르도 외치는데, 갑자기 막내가 오랜 시간 준비한 자기는 찍어 주지도 않았고 앙코르도 안 불러주었다고 심술 부렸습니다. 그러니 큰 아이가 화가나 소리를 질렀고 막내도 덤벼들었습니다. 둘째 딸은 내 생일에 이게 무슨 짓이냐고, 내가 없어지겠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막내가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눈이 뒤집혀 딸을 때리고, 벽을 치고, 의자를 들었는데, 이런 저를 아내가 말리다 갑자기 거실에서 하나님!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회개 기도를 하니, 다들 잠잠해졌습니다. 그래서 다들 사과를 하고 끝이 났습니다. 몇년 전 아내를 때렸을 때도 손가락이 부려졌는데 이번에도 손으로 벽을 치 는 바람에 손가락이 부러져 수술하고 퇴원했습니다. 퇴원하는 날 김양재 목사님의 나를 살리는 회개 설교를 5번 들으며,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달았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저는 학교생활 가정생활 모두 힘들어하는 큰아이를 보면서 다윗처럼 회개하지 못하고, 때린 죄인입니다. 집에 와서 가족 예배를 드리며 새해 바라는 것을 나누면서 제가 가족들에게 더 인정받는 남편과 아빠의 모습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더니 아들이 엄지손가락을 위가 아니라 아래로 척 내렸습니다.
편안하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 성령의 실상이 되었다는 증거이고, 잘 되어가는 가정입니다. 우리는 가족끼리 미치도록 싸웁니다.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한 사람 엄마가 회개하니까 잠잠해졌다고 했습니다. 말씀으로 회개하며 자기 죄를 보니까 이 땅의 실상으로는 콩가루같이 싸웠지만, 성령의 실상으로 변하게 된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