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각오]
행 211:7~14
2021년 마지막 주일에 성령의 각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각오는 본문의 원어로 언제든 복음을 위해 죽을 수 있음을 뜻합니다. 즉 내 본향 천국에 갈 준비가 언제든 되어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의 각오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복음 때문에 영적 화해를 이루어내야 합니다.
지난주에 바울은 이방인 두로의 제자들에게 화해를 청했고, 오늘은 바울에게 핍박받은 피해자가 있는 돌레마이에 도착해 형제들에게 일일이 포옹을 하고 진심으로 안부를 묻습니다. 그리고 하루 만에 화해가 이루어져, 지체하지 않고 가이사랴로 향합니다. 가이사랴는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에 이어 두 번째로 자주 언급되는 황제의 도시로, 유대와 사마리아와 유럽을 잇는 전략적 요새인 항구도시였습니다. 그리고 빌립 집사가 로마총독부가 있는 이곳에서 전도해 교회를 세워 돌보고 있었는데, 오늘 바울이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물렀다고 합니다. 바울이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고 했는데, 본문은 들어가서를 강조했습니다. 바울이 두로와 돌레마이에서 화해의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순간에, 예루살렘의 전설적인 전도자 빌립과 화해를 해야 하는 힘든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렇게 바울은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듯,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듯, 죽이려고 하는 소동이 난 에베소 극장에 들어가듯 빌립 집사의 집에 들어가는 힘든 적용을 합니다. 빌립은 예루살렘 교회 일곱 집사 중 스데반에 버금가는 일꾼인 전도자였고, 스데반 순교 후에 전도사역이 기록된 유일한 집사입니다. 그리고 스데반과 가까운 사이였기에, 그만큼 바울에게 상처가 컸을 것입니다. 바울은 인생의 마지막 여정에 빌립과 화해의 자리로 들어간 것입니다. 10절에서 여러 날 머물렀다고 하는데, 용서를 구하고 화해하기 위해 충분한 시간을 함께 보내며 바울과 빌립이 말씀으로 해석한 삶을 나누고 성령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화해가 일어난 것입니다. 지체에게 서운한 마음이 있었다면, 같이 들어가서 머물 때 성령의 화해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둘째, 환경에 장사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아가보는 글라우디오 황제 때 천하에 큰 흉년을 예언한 대선지자로서, 그가 바울의 띠를 가져다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이 띠 임자가 이렇게 될 것이라고 생생하게 예언했습니다. 누가를 포함한 바울의 동행자들 모두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사랑으로 함께 권했다는 말이 바로 파라칼레오입니다. 전도자 칭호를 가지고 안정된 삶을 살고 있던 빌립과 유명한 아가보 선지자와 유명한 예언가인 빌립의 딸들이 바울 동행들의 마음을 흔들어 예루살렘 행을 만류합니다. 이때 바울이 정말 난감하고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예언의 한자는 맡길 예 미리 예 말씀 언 자로 말씀을 맡겼다는 뜻는데, 딸들에게 맡긴 그 말씀으로 고난을 피하라는 예언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 묵상의 꽃은 십자가를 지는 적용입니다. 그때 영혼 구원이 따라옵니다.
셋째, 주 예수의 이름으로 각오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들의 모든 외침에 단호하게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고 질타합니다. 바울은 복음 때문에 애통해 마음이 상했지만, 주님의 은혜가 참으로 크고 귀하기에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바울은 자기 죽음을 만류하는 성도의 사랑을 분별하면서 인간적인 호소에 설득 당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학식, 힘, 의지와 열정으로 죽기를 각오하며 일사 각오를 했던 때의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잔멸, 결박, 핍박하고 살해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주의 이름을 묻고 그 이름을 알게 되었던 그 때에 비로소 나의 각오가 성령의 각오로 변화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모든 성도 중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감당치 못할 자, 죄인 중 괴수라 했습니다. 바울이 자신이 죄인 됨을 점점 더 깨달으니, 성령의 사명을 위해 죽기를 각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고백은 핍박과 유혹이 있었던 에베소, 두로, 돌레마이, 가이사랴 에서도 한결같았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전설적인 전도자 빌립과 예언자인 딸들은 바울의 이런 고백에도 돌이켜 바울을 따라나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인류에 복음이 전해지는 행위이니 가는 것이 맞는데 이를 분별하기가 이렇게 어렵습니다. 바울도 현재를 사는 우리도 모두 복음 때문에 살아야 하기에 구속사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죽는 각오는 내 본향 천국에 들어갈 최고의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각오입니다. 바울은 이 땅이 끝이 아니니 자신 있게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죽는 죽음은 저 천국에서 시작하는 최고의 준비이기에 이것이 성령의 각오인 겁니다. 이 땅에서는 끝났다고 해도 그 끝이 시작이기에 예수 이름을 위하여 우리가 잘 결박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음란하고 악한 내가 천국에 들어가는 최고의 준비이며, 잘 결박 당하고 잘 죽어지는 것이 성령의 각오입니다.
공동체 고백은 목사님이 11년 동안 우리들교회에서 평신도로 섬기셨는데, 최근 목장을 인도하면서 부목자님의 직장 문제에 대해 처방한 내용입니다. 이 분은 학벌도 좋고 목회도 잘한 목사님이셨는데, 할아버지의 유산을 받은 후 주식하다 망해 몇 년 동안은 말씀으로 해석보다는 해결만을 바랐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제자로서의 정체성부터 새롭게 찾으면서 일상에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먼저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직장에서는 직무의 십자가, 가정에서는 가장의 십자가를 지고 일상생활을 잘 감당하는 것이 사명인 것을 깨달으셨습니다. 최근에 읽은 책에서 구조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 인상 깊었는데, 그런 점에서 우리들교회 목장 구조가 정말 좋은 구조로 좋은 관계보다는 이 구조 속에 있다는 것이 가장 안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하셨습니다. 부목자님에게 계속 공동체에 묻고 나누면서 이직을 진행하기보다 현재 성실하게 직장생활을 하면서 부부관계의 회복, 주일성수, 봉사가 필요한 것 같다는 처방을 하셨는데 맞습니다. 우리 모두 하늘에 숨겨둔 소망을 품고 마지막까지 분별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공동체에 묻고 갈 때 우리의 각오가 성령의 각오가 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