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안아주심]
행 20:1~12
심리학자 존 락은 안아주는 것이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소를 줄여주기 때문에 건강에 굉장히 좋다고 합니다. 사람이 안아주는 것도 이렇게 좋은데 하나님이 안아주시면 얼마나 좋을까요?오늘은 유두고를 안아 주신 것처럼 성령의 안아주심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권면의 말씀으로 위로하십니다.
소요가 그친 후에 바울은 한숨 돌릴 수 있었지만, 제자들을 불러 권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원어로 파라칼레오 라고 하며 파라는 옆에라는 뜻이고, 칼레오는 부르다 입니다. 다시 말하면 곁에 불러 놓고 부모의 마음으로 끊임없이 위로하고 권면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냥 옆에 있어 주고, 이름 한번 불러주고, 처절한 현실을 들어주고, 손 한번 잡아 주는 것이 위로와 격려가 되어 우리를 안아주심이 됩니다. 바울은 우리와 다르게, 소동이 있을 때는 그곳에 죽고자 있고 소동이 끝나니까 이제 권하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관심은 오직 제자들에게 있었습니다. 제자의 뜻은 나를 위해 살지 않고 나를 부르신 이를 위해 살고 그 뜻에 자발적으로 묶여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기댈 것 하나 없는 성도들에게는 바울이 전해주는 하나님 나라의 말씀이 유일한 피난처가 되었을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말씀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인생이기에 주님께서는 성도를 고아처럼 내어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파라칼레오하며 권면의 말씀으로 옆에 계십니다. 오늘 하루하루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낼 때, 옆에서 도와주시는 성령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이것이 성령의 안아주심입니다. 즉, 인간적인 것보다 말씀으로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함께 가는 우리 공동체 그 자체입니다.
마게도냐 심방을 마치고 헬라, 즉 아가야 지역으로 간 바울은 그곳에서 석 달을 머물게 됩니다.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고, 여러 가지 음란으로 인한 배신감으로 보고 싶지도 않은 고린도이지만 그곳에서 사랑과 관심으로 양육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가르치며 3개월 동안 머물면서 로마서를 썼습니다.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어 여러 교회에서 모은 헌금을 전달하기 위해 안디옥에 갔다가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했지만, 유대인들이 바울을 배에서 죽이려는 공모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피해서 수로가 아닌 육로 먼 길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이 외로운 바울의 여정을 함께 하는 지체들이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바울에게 함께 가는 지체들을 주셔서 안아주십니다. 그들은 바울이 사역한 마게도냐와 아가야, 그리고 갈라디아와 아시아의 교회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 사람이 함께 강도의 위협을 무릅쓰고 육로로 긴 여행을 하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먼저 아시아의 맨 끝 드로아로 보냅니다. 큰돈을 맡기며 먼저 바다를 건너게 할 정도의 신뢰가 형성된 지체들을 허락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내 사명이 무엇이고 그 사명의 무거움과 내가 받은 구원의 값을 아는 사람만 돈을 다룰 수 있습니다. 성령의 안아주심은 이해타산을 넘은 참된 지체를 내 주변에 허락해주십니다. 바울은 소수의 동역자를 데리고 육로로 돌아 드로아까지 갔습니다. 어떤 소동이 와도 말씀으로 하나 된 우리 공동체가 있으면 진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내 말을 할 수 있고 나와 같은 지체의 말을 들을 수 있기에 우리가 됩니다.
셋째, 떨어지는 약함까지 안아주시는 회복입니다.
다락방에서 주일예배를 함께 드리는데, 바울의 강론이 밤늦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큰 사건이 일어납니다. 유두고는 창틀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밤이 깊어지자 쏟아지는 잠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깊이 졸다가 3층 건물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사고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유두고가 떨어지는 약함의 자리로 오늘 내려갔다고 합니다. 그 눈높이로 내려갔습니다. 구속사적인 공감과 성도의 교통을 한 것입니다.죽은 유두고를 꼭 끌어안은 바울은 두려움과 당황에 빠져서 어찌할 바 알지 못하며 소란스러운 지체들에게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라고 말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은 바울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울을 통해서 하시는 일입니다. 가장 거룩하신 예수님께서 가장 더러운 십자가를 자기 십자가로 지고 세상이 하지 못하는 적용을 하셨듯이 우리도 진짜 거룩인구원 때문에 연약한 가족과 지체를 끌어안아야 합니다. 그 연약함과 아픔과 죄악을 내 연약함과 아픔과 죄악으로 안아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안아주심입니다. 이제 비천한 인생이었던 유두고의 삶이 다른 사람에게 약재료가 되며 다른 사람의 위로가 됩니다. 유두고는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힘들고 지친, 세상의 권세 앞에 어쩔 수 없이 죽을 수밖에 없더라도 힘든 몸을 이끌고 예배의 자리에 나온 것밖에 없습니다. 거기에 생명의 회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피투성이가 되면 죽어야 한다는 생각은 세상의 생각이고 마귀가 주는 착각입니다. 피투성이라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성령의 생각, 구원의 생각입니다. 성령의 안아주심은 결국 여러분 안에 생명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한 목자님의 큐티 나눔입니다. 학교 선생님과 상담 후에 딸아이에게 '너는 평균 이하야'라는 말을 했는데 상처받은 딸이 손목을 그어 자해했다는 것입니다. 인정받고 싶어서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했지만, 딸은 절망하며 어렵게 붙들고 있던 손을 뿌리친 셈이었습니다. 눈으로만 쓱 읽어버렸던 성전 모양처럼, 아이의 아픔들의 깊이와 좌절의 넓이, 고뇌의 높이들을 그렇게 쓱 읽어 내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모르는 제게 주님은 성소의 규례를 보여주셨습니다. 딸의 마음을 살피어 관찰하고 재고 측정하고 의미와 이유를 고민하며, 가장 중요한 목적인 예배 드리는 것이 주님이 오늘 아침 제게 보인 성전의 모습이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성전을 이루어가면서 치열하게 적용을 하며 해석이 되어야 통과할 수 있고, 그래서 해결이 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안아주심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러분을 안고 계신 성령님께서 지금 당하고 계시는 모든 고난과 사건보다 강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살려주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