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살리심]
행 13:24-30
오늘은 성령의 살리심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앞서 보여주며 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앞서'(24절)는 얼굴 앞에라는 말인데 원어의 의미는 그의 들어감의 바로 앞에, 즉 세례 요한이 바로 예수님의 얼굴 앞에 서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주 예수님을 미리 전파할 때 세례 요한의 얼굴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보이며 요한이 먼저 회개의 표징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누군가가 앞서서 예수님의 얼굴을 보여주었기에 모두 나와서 이렇게 회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얼굴은 무엇을 뜻할까요? 그것은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25절)라는 질문과 세례 요한 자신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한 답입니다.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그리스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왕궁에 거하지도 않고 화려한 의복도 입지 않고 광야에서 메뚜기 석청을 먹으면서 청빈하게 사니, 백성들이 열광해서 온 유대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백성들이 다 세례 요한을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백성들은 식민지 생활을 하고 있으니 구원해줄 구세주가 너무 필요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구세주가 맞아 보이는데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얼굴을 보여준 것은 바로 이점입니다. 사람이 열광하면 나도 모르게 우쭐해집니다. 그 영광을 내가 다 취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나는 그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25절) 했습니다. 이것은 최고의 사명을 감당한 것이고 사명을 완수한 것입니다. 이 구원의 확신으로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의 얼굴을 앞서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예수의 얼굴을 하려면,
둘째, 구원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유대인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이방인으로 개종한 사람들을 말하는데 이 모두를 '형제들아'라고 칭하고 있습니다(26절). 그리고 수동태 문장이기에 이 구원의 말씀이 우리를 위하여 보내졌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곧,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은 약이 되어서 우리를 살립니다. 하지만 그 당시 백성들은 선지자들의 '말'(27절)을 늘 회당에서 들었습니다. '말'로 번역된 단어는 원문에 보면 로고스 word가 아니고 코네 voice로 즉 너희들이 맨날 선지자들이 회당에서 구약을 낭독하는데 그것을 word(말씀)로 듣지 않고 voice(음성)로만 듣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교리만 있고 교리를 넘어선 진리를 결코 보지 못합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정죄했지만, 대제사장 가야바는 예수님에게 사형에 해당할 만한 죄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28절). 죄로 번역된 일반적인 단어, 표적에서 벗어났다는 하마르티아 라는 것이 죄의 원어로 쓰이는데, 여기에서는 그 단어가 아닌 이유와 혐의, 원인을 뜻하는 아이티안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단어를 쓰면서 예수님에게는 죄로 의심할만한 혐의조차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의 무죄한 죽음을 통해 그의 대속자 되심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고 청했지만, 빌라도는 민란이 날까 봐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정치적 이득 때문도 아닌데도 스데반을 죽이는데 가담했습니다. 바울과 유대인들이 하나가 되어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잔멸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공문을 가지고 가다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을 만나지 않으면 내가 무엇을 하는지 모릅니다. 내가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주님을 만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자기가 무엇 때문에 사는지도 모릅니다.
셋째, 저주를 받아내야 합니다.
무지한 예수를 죽인 일은 구약에 기록된 예언을 성취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한다는 생각으로 예수님을 죽인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구세주인 예수님을 죽인 사악한 일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 되었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파는 것이 인류의 구속사를 이룰지 어찌 알았겠습니까? 이는 구속의 역사가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계획하신 바에 따라 한 치의 어그러짐도 없이 진행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박해할수록 저주를 받아내야 합니다. 날마다 받아낼수록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 된 줄 믿습니다. 늘 성경대로 하루하루 살면 그것이 말씀을 다 응하게 하는 일이 될 줄 믿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예수가 달린 곳을 십자가라고 하지 않고 '나무'(29절)라고 한 것은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서 저주를 받았음이니라.'는 신명기 21:23절의 예언을 성취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나무'라고 했기 때문에 하늘과 땅의 모든 저주를 당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이아몬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으면 이걸 저주라고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명기에 나무에 달렸다고 그것을 저주의 표징으로 이야기하셨습니다. 이것이 구속사입니다.
넷째,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되려면 말씀이 필요하고 저주를 받아내야 합니다. 그러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내십니다(30절). 이 땅의 어떤 저주받은 사람도 우리 성자 예수님이 인간의 모든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살아남을 수동적으로 당한 것에서 더 나아가 스스로 살아나신 능동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빌라도가 사형을 언도했기에 십자가에서 죽임당한 것도 있지만 십자가도 성자 하나님이 스스로 택한 것입니다. 원래 죽음이라는 것은 죄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래 죄 없는 예수님은 죽을 이유도 필연성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죄를 범한 모든 인류를 대신하여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죽이시고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리시고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체에 계셨다면 너무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살아나셨기 때문에 살리심을 입고 살리고 하는 성 삼위 하나님이 같이 역사하셔서 그때 성령님이 효과적으로 돕기 때문에 살려 내신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살리심으로 사시는 한 주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