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선행과 구제]
행9:36-43
코로나19로 인해2월 달에 제일 먼저 자발적으로 온라인 예배를 시작했는데 벌써 오늘이13주차입니다.
우리는 걸어 다니는 성전이기에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보이기 위해 죽어지는 성령의 순교를 해야 하고 흩어져도 큰 기쁨,큰 능력,큰 권세가 있어 수가 더 많아지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성장은 영육간의 정돈으로 이어져 오늘 살펴 볼 성령의 선행과 구제로 이어집니다.
첫째,제자여야 합니다.
그 당시다비다는 아람어와 헬라식의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헬라식 이름으로는 도르가입니다.이로 보아 그녀는 헬라파 유대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그녀는 누구보다도 선행과 구제에 열심이었고 헌신적이었던 아름다운 심성을 가진 여성이었습니다.특별히 선행과 구제가 심히 많았다고 합니다.우리들교회도 이번 코로나19의 피해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 나름대로 소리 없이 조용히 구제에 힘을 보탰습니다.그래서 이렇게 오늘 본문에 선행과 구제가 나왔기 때문에 한 번 더 이 말씀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다비다 앞에 여제자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는데 제자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전할 수밖에 없는 자이고 그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 입니다.생명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따라서 제자는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자입니다.예수님의 길은 가시밭길인데 그 길을 진정으로 가고자 하는 사람은 남.여는 물론 이방인이라고 하여도 차별하지 않습니다.아니 차별해도 차별 받지 않습니다.빌립이 전했건 헬라파 그리스도인 중 누가 전했건 다비다는 복음을 제대로 받아들여서 성도를 넘어서는 제자가 되었고 이런 제자여야 제대로 된 선행과 구제를 할 수 있습니다.
둘째,자기 죄에 절망하는 사람이 선행과 구제를 합니다.
구제와 선행이 심히 많은그때에병들어 죽었다고 합니다.본문은 다비다와 도르가를 같이 계속 병행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베드로가 오니 모든 과부가 도르가의 선행을 기리면서 속옷과 당시 재산으로서의 가치가 있던 겉옷을 다 내보이고 그녀를 위해 울었다고 합니다.실로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죽음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애도하게 할 만큼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았습니다.그래서 죽음이란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하여 가장 정확한 평가를 내리는 시금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그런데 큐티 제대로 하지 않고 문자적으로만 성경을 읽고 해석하면 도르가의 선행과 구제가 심히 많아서 다시 살려주신 것 같습니다.그래서 늘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사람의 행위를 경계해야 합니다.항상 사람이 영광 받는 것을 극도로 조심해야 합니다.
마태복음18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에 등장하는 한 관원이 있습니다.왕으로부터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일만 달란트의 큰 빚을 탕감 받은 자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사람이야말로 큰 은혜를 받은 자였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탕감 받고 나가서는 자신에게 일백 데나리온의 작은 빚을 진 동료의 목을 붙잡고 나한테 진 빚 갚으라고 목을 조르면서,돈을 못 갚으니까 그 동료를 옥에 가두어버렸다고 합니다.이 사실이 곧 임금에게 알려진 결과 그는 어떻게 되었나요?탕감 받은 모든 은혜를 다 빼앗기고 자신이 진 빚을 갚기까지 영원히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백 데나리온 갚지 못한 사람을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사람이 용서하지 않았습니다.죄가 우리 속에 있으면 그 죄는 우리를 죄의 결과인 죽음으로 끌고 가기 때문에,용서하지 못하는 불순종이 우리에게 있을 때 죽음과 사망의 냄새가 우리를 뒤덮는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상대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우리의 삶을 뒤흔듭니다.그러니까 불쌍히 여기지 못하는 게 지옥입니다.나의 신분은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사람입니다.내 죄가 일만 달란트처럼 많다면 얼마나 절망이 되겠습니까?다비다는 바로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마음으로 선행과 구제를 하니까 흘러넘칩니다.아무리 주어도 또 줄 것이 채워져서 넘치는 것입니다.때문에 조금도 생색을 낼 수 없는 그녀의 마음가짐입니다.사도바울이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인 것을 생각할 때마다 그는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라며 자기 죄를 보고 절망했을 것입니다.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 은혜입니다.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탕감 받았다는 게 깨달아지는 것이 은혜라고 합니다.우리는 일만 달란트 탕감 받고 살아가는 그 인생에서 어느 때라도 주님이 오라고 하시면 가면 됩니다.실컷 구제하다가 상으로 병과 죽음을 주실 수 있습니다.열심히 선행과 구제를 하다가 하루아침에 갈 수 있습니다.다비다를 보니까 그 당시 꼭 오늘 떠날 것 같은 태도로 살았기 때문에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선행과 구제를 심히 많이 할 수 있었겠지요.
내가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자라고 생각하면 그런 선행과 구제가 쉬울 수 있습니다.그러면 마태복음의18장에 나오는 선행은 무엇일까요?용서를 최고로 칩니다.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그런데 일만 달란트틑 탕감 받은 자의 태도라면 용서 또한 쉬울 수밖에 없습니다.자기가 하는 게 아니니까,자기 죄,그 주홍빛 같이 붉은 죄,닭털같이 많은 죄를 볼 수 있으면 그런 사람이 무엇을 못 하겠습니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하며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그래서 용서는 최고의 복수입니다.한마디로 선행은 구원의 일입니다.구원의 일보다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일만 달란트 빚진 자처럼 기쁘게 참고 인내하며 걸어가는 길이 가장 큰 선행입니다.생색이 날 수가 없습니다.
셋째,영생을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의 생명이 끝나는 날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요?다비다가 병들어도 과부여도 천국을 누리며 갔다는 것과 이미 영생에 속한 자라는 것을 이 땅의 사람들이 알아야 되잖아요.그래서 그녀가 죽자 씻어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다락방에 눕혔습니다.그리고 베드로에게 지체하지 말고 와달라고 청했습니다.그들은 다비다를 살려주실 것이라는 부활신앙을 믿었습니다.그녀가 믿음의 여인이라는 것을 아는 제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이 일은 베드로가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셨다는 것을 누가는 계속 강조합니다.성도는 하나님의 권능을 전달하는 통로이기에 베드로의 명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난 것이지 그것이 베드로가 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9장의 중심메시지는이 모든 일을 다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이게 주제입니다.베드로는 룻다와 욥바에서 두 가지 큰 이적 즉 중풍병자 고치고 죽은 자를 살렸는데 마치 주님의 공생애 사역을 보는 듯합니다.주님은 일찍이 당신을 믿는 자는 주님과 같은 능력을 행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때문에 우리는 병들고 아파도 영생의 확신을 가지고 분하고 섭섭해 하고 원망하지 말아야합니다.
말씀 맺습니다.진정한 성령의 선행과 구제는 제자여야 하기에 생색내면 않되고,일만 달란트 빚진 자같이 자기 죄에 절망하는 만큼 이 땅에서도 천국에서도 영생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