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
골로새서 1:1-2절
사역에서 섬세함이란 다른 누군가의 고통에 대해 마음의 결을 맞추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사역은 예배 공동체인 교회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무엘상하의 긴 대장정을 마치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기 원하실까 묵상했습니다. 개척 초기에는 하나님께서 무너진 한 사람 한 사람을 독특한 방식으로 개별적으로 부르시고 세우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선 각 사람뿐 아니라 우리들교회 전체에 공동체적 사명을 주시고 이에 응답하는지 아니면 나 자신 내 가족 우리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안주하며 우리끼리만 좋아하는 것은 아닌지 지켜보고 계시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척 초기에 설교했던 골로새서를 살펴보며 우리들교회에 주신 공동체적 소명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 소명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뜻이 있으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한 개인에 대한 의도와 기대를 말합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뜻이 소명인데 부르실 때는 개별적인 소명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인 소명도 부여하십니다. 지난 주 큐티 본문인 사사기 4장에 드보라가 사사가 되어 40년 통치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바락이 용사였지만, 본인의 영광은 제쳐놓고 오직 이스라엘의 승리만을 위해서 드보라 밑에서 철저히 이인자를 자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자가 리더십을 가지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인데, 남자들을 세우고 가정을 세우고자 시대적으로 하나님께서 저를 쓰신다고 생각을 합니다. 여성의 역할은 남편과 자녀를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는 것이 일차적으로 보입니다. 어떤 것 하나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해서도 안되고 뜻이면 어떤 일도 해야 합니다. 가정이나 교회나 나라나 이런 각자의 소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부르심 받은 자리는 어딥니까?
두 번째, 소명에는 동역자가 있습니다.
진정한 소명이라면 형제라 부를 수 있는 동역자를 허락합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동역자가 되기에는 출신과 배경이 너무 멀었는데 1차 전도여행 때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로 한결같이 믿음이 성장하여 바울의 오른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가르칠 때, 이런 믿음의 걸물을 키워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늘 내 힘으로 하면 생색밖에 날 것이 없습니다. 사랑의 본질은 상대방의 가치와 상관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그렇게 불러주셨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또 형제와 동역자로 인정해 주십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동역자로 삼았듯이 소명의 자리에 함께할 동역자 형제가 있습니까? 있다면 누굽니까?
세 번째, 그래서 소명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이렇게 바울처럼 하나님의 뜻으로 소명을 받고 디모데같은 동역자가 생기면 지경이 넓어지고 힘을 얻어서 2절 말씀처럼 골로새 같은 교회로 나가게 됩니다. 골로새 교회는 라오디게아, 히에라볼리 도시와 같이 성장했지만 지진으로 갑자기 삼류도시가 되어 힘들었기 때문에 부르짖어서 간절히 하나님을 사모하게 되니, 이 천년이 지난 지금 성경에서 언급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소명이 있다면 디모데 같은 사람, 골로새 교회 같은 사람을 찾아가서 차별 없이 전하고 또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아들, 딸, 며느리, 사위도 내 자식인데 전혀 다른 입장에서 차별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내가 찾아가야 할 영육간에 힘든 소명의 대상 골로새 교회는 누굽니까?
네 번째, 소명에는 가장 중요한 은혜와 평강이 따라옵니다.
은혜와 평강이라는 단어를 바울 사도가 잘 쓰는데 은혜는 헬라식 인사이고 평강은 샬롬이라는 히브리식 인사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소수 민족이어도 선민의식이 강해서 늘 히브리식 인사만 하고 히브리어만 썼습니다. 하지만 이 서신이 쓰일 당시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팍스로마나 시대로 성경도 헬라어로 쓰였습니다. 영적으로 최고의 교만한 사람과 육적으로 최고의 교만한 사람이 불이 붙은 그런 시대에 바울 사도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이 두 문화를 다 인정해 줘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한테서 온 은혜를 빌어주며 나라의 문화, 가정의 문화, 개인의 문화를 인정하면서 지혜롭게 포용할 때 구원의 소명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제사를 지내거나 우상을 섬기는 것은 절대 타협의 대상이 아닙니다. 본질 때문에 비본질을 포기 혹은 허용하십니까? 비본질 때문에 본질을 포기하십니까?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은혜와 평강이 있기 위해서 두 번째는 모든 것을 하되 하나님과 연관 지어서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오늘의 결론입니다. 우리가 말을 해도 어디를 가도 모두 하나님과 연관이 되어야 합니다. 과학자는 과학적인 관점에서, 경제학자는 돈 관점에서, 심리학자는 심리학적 관점에서 평가하고, 다 자기 세계관이나 가치관을 최고로 여깁니다. 우리들교회의 엄마와 함께하는 큐티, 어린이 큐티, 청소년 큐티가 장년 큐티인과 같은 본문으로 하는 것은 하나님 중심으로 양육 받는 최고의 과정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런 양육을 통해서 그 한 사람의 소명을 받게 하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은 모든 것을 하나님과 연관 지어서 하고 있습니까?
소명의 자리에, 하나님의 뜻으로 부르심 받은 자리는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름 부으심이 있을 것입니다. 소명의 자리에 함께할 동역자 형제가 있습니까? 내가 찾아가야 할 힘든 소명의 대상, 골로새 교회는 누굽니까? 소명에는 은혜와 평강이 반드시 따라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