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구원]
삼상 14:1~23
사울이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월권하고 변명하면서 위기가 왔습니다. 이스라엘은 철연장도 없고 블레셋 군대의 수는 해변모래의 수보다 많은데, 하나님은 자기백성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에 사울을 넘어서는 아들 요나단을 허락하셔서 이 위기에서 여호와의 구원을 이루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요나단이 여호와의 구원을 어떻게 이루는가를 우리가 보기를 원합니다.
첫째, 요나단은 아버지 장애를 넘어섰습니다.
구속사적으로 공과 사가 분명해야 합니다. 요나단은 여호와의 구원을 위해 난공불락의 블레셋과 싸우기로 하지만 사울에게는 알리지 않았는데, 사울은 왕이면서 최고 지도자이지만 예배 중독자이며 믿음의 얘기가 통하지 않는 아버지였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지금이라도 돌아오라고 사울을 야단친 건데 석류나무 밑에서 한숨만 푹푹 쉬고 있는 것은 자기 열심만 있고 자존심만 상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의 후손을 옆에 붙여 놓고 하나님께 묻지 않고 오직 이기게만 해 달라고 자기 희생과 십자가와는 거리가 멀어 그럴수록 예배 중독이 되어 죽자고 살면서 적용이 안 됩니다. 세계적 선지자와 세계적 아들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은 감사하지 않고 지옥불에서 올라온 교만으로 지옥을 살고 있습니다. 가장 무서운 위기는 환경이 아니라 내 주의 주권을 비난하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요나단이 이런 아버지를 읽고, 너무 사랑하지만 아버지를 넘어가는데, 아버지 때문에 예수를 믿었지만 효를 넘어서 객관적으로 나가길 바랍니다.
둘째, 담대함으로 요나단이 나갔습니다.
요나단은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만 의지하며 요동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환경과 상관없는 것이 구원입니다. 블레셋을 무찌르러 가는 길은 유혹과 핍박이 기다리지만, 혼자 가야 하는 일이고 대단한 아버지에게서 이해도 도움도 받기를 거절하면서 가는 외로운 길인 것입니다. 믿음이 희귀한 시대에 다윗에 버금가는 부하가 사역에 동참하겠다고 하는데 생명을 내놓기를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들의 만남이 얼마나 설레고 기쁜 것인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모릅니다. 요나단은 하나님께 묻고 여호와의 구원을 얘기하면서 사울과 아히야의 그룹과 대조를 이루는데, 하나님은 누구의 편에 서시는가를 보여 줍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은 일이라지만 요나단이 두명으로 해변의 모래같은 그들을 물리치지 않았습니까? 아버지에게는 불효이지만 그것은 아버지를 넘어가는 일이며, 구원의 일과 효도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진실로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수의 많고 적음에 달려있지 않는데, 지금 용기를 가지고 담대히 나갈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셋째, 여호와의 구원에서 요나단이 성경적 표징을 구합니다.
요나단은 자기의 열심으로 하지 않고, 성경적인 표징을 구했습니다. 무모하게 돌격한 것이 아니라 올라오지 말라 하면 올라가지 않고 올라오라 하면 공격하자 그렇게 기도하며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표징을 구한 것입니다. 큐티하면서, 목장에서 나누면서, 설교 들으면서 묻고 표징을 구하라는 것이며, 그래서 욕심이라고 하면 안 하겠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연약할수록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여전한 방식의 생활 예배가 얼마나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지 모릅니다. 요나단과 부하는 너무나 연약해서 절대적으로 하나님 붙들었는데, 요나단이 구원의 대 승리를 거두고 구원의 일을 얻어냅니다. 벧아웬에서 시작된 전쟁이 벧아웬을 지나게 되었고, 그래서 나의 우상이 이 사건으로 물러가고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구원임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