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 받은 암소처럼]
삼상 6:1~18
언약궤를 운반해 가는 암소가 쓰임 받듯이 감당 할 수 없는 상황도 하나님이 이끄시면 쓰임 받지 못할 피조물은 이 땅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에 말씀이 희귀하니까 인재도 희귀하여 암소가 사명을 감당하는 슬픈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스스로 반역할 수 있지만 이로 인해 임하게 되는 심판 앞에서는 무능하기에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명 받은 암소처럼 살아야 합니다.
첫째, 사명은 선택을 받아야 합니다.
암소 두 마리가 끌려와서 부름을 받듯이 사명은 자원함이 아니라 부르심이 먼저입니다. 멍에를 매어보지 않은 암소들은 새끼를 낳자마자 생이별을 당하고 법궤를 실은 수레를 벧세메스로 옮겨야 하는 사명이 주어집니다. 암소가 잘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회복을 위해 강권적인 이끌림에 의해 선택 되었습니다. 언약궤를 옮기는 사명이 비열하고 잔인한 대접을 받고 핍박 받는 것 같아도 주권과 사명을 깨닫게 된다면 그 일로 인해 구속사가 이루어 집니다. 내가 택한 백성이라는 것과 지금 힘든 그곳에서 하나님의 선택이 깨달아 졌다면 그곳이 사명의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 지명하여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둘째, 사명은 인정도 초월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 암소가 송아지들을 집에 떼어놓고 모정도 인정도 초월하고 본능을 뿌리치고 하나님의 목적 하심에 따라 사명의 길을 갑니다. 복음은 “자기부인”이 따라와야 합니다. 사명은 이원론이 될 수 없습니다. 정과 육을 십자가에 못박게 되면 모정과 인정을 초월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데 내 자녀를 붙드는 것은 자기 우상입니다. 엘리도 자녀 때문에 망했습니다.
셋째, 사명은 바로 행하며 대로로 가야 합니다.
바로 행한다는 것은 곧은 진리의 길처럼 주님의 멍에를 지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궤와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을 메고 가는 것이 무거웠지만 말도 안 되는 사명의 길을 가라고 하십니다. 대로에는 블레셋처럼 눈도 깜짝하지 않은 장애물같은 인간들이 많습니다. 주의 길을 갈수 없는 형편과 환경이지만 우리는 넓은 대로를 닦는 사람들입니다. 누구와도 신앙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하고 투명하고 바로 행하며 가야 합니다.
넷째, 사명은 좌우로 치우치지 않아야 합니다.
치우치지 않았다는 것은 절대순종을 말합니다. 두 암소는 새끼들을 생각하며 뒤돌아 보고 싶었지만 언약궤를 운반하는 사명에서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꾀를 내지도, 뒤돌아 보지도 않았습니다. 처절하고 힘든 사람들은 목장이 은혜가 되고 영의 이야기도 잘 듣고 단합이 잘 됩니다. 십자가를 붙들지 못하고 성공복음, 승진복음, 다른 복음에 열심을 쫓다 보니 올바른 역사관, 구원관, 사명감이 없어 블레셋 사람들처럼 치우칩니다. 바른 복음은 십자가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확하게 인도함 받지 않으면 똑같이 해도 맞지 않습니다.
다섯째, 사명은 눈물로 가는 길입니다.
암소들은 생전에 한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길을 걸으며 새끼들을 생각하며 울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눈물없이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느헤미야의 눈물골짜기처럼 새끼와 떨어져 자기 죄로 인한 애통의 눈물과 사죄 때문에 복받치는 감격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심한 통곡과 눈물과 간구와 소원을 올렸을 때 들으심을 얻은 기도가 눈물의 기도입니다.
여섯째, 사명은 거룩한 번제로 드려집니다.
일상생활에서 인정에 치우치지 않고 대로를 행하며 눈물로 가는 길을 잘 걷는 사람들은 구원을 위해 사명을 감당하기 때문에 그것이 순교입니다. 말세의 순교는 혈기를 부리지 않는 것입니다. 두 암소는 이름도 빛도 없이 하나님 앞에 희생이 되어 번제의 재물이 되었습니다. 번제물은 수컷 이어야 하는데 언약궤를 옮기고 나서 다시는 세속적인 목적으로 사용 할 수 없는 특별한 이유처럼 성도들의 생명까지도 요구 하실 때 기꺼이 즐겨 드려야 합니다. 자격과 공로가 하나도 없는 우리지만 지금 이 자리가 사명의 자리입니다. 강권적인 이끄심이 아니고는 설명이 안되지만 하나님의 선택은 차별이 없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