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보좌]
요한계시록 4:1-5
리비아 카다피가 비참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42년 독재를 통해 170조 재산을 모았던 무소불위의 독재자였습니다. 권력으로 따지면 로마 황제도 비슷했을 것입니다. 그런 황제를 숭배하지 않고 순교한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하늘 보좌를 보여 주십니다. 하늘 보좌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첫째, 하늘에 열린 문으로 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열린 문을 주셔서 이 문을 통과하는 자에게 구원의 기쁨에 동참하는 기쁨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에스겔서를 보면, 에스겔이 사로잡힌 지 5년 만에 이상 보여 주셨습니다. 요한도 밧모섬에 갇혀 있을 때에 이상을 보았습니다. 사로잡혀서, 갇혀서 이상을 보게 하십니다. 에스겔 1:1을 보면, 하나님이 나타날 것 같지 않은 환경 속에서 내가 최고로 여기는 것이 사로 잡혀 있을 때 하늘이 열립니다. 그것도 5년이 되어야 그렇게 됩니다. 돈, 학벌 보고 결혼 하고 사업을 하지만 막상 보면 그곳이 바로 사로잡힌 곳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로잡혀야 하늘이 열리고 이상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을 알아들을 사람에게 특별히 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이 임하시면 마땅히 될 일을 보여주십니다. 우리의 구원과 심판은 마땅히 되어야 할 일입니다. 심판 받는 자에게는 두려움, 구원 받는 자에게는 소망이 됩니다. 말씀이 깨달아 지면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게 됩니다. 권능이 임한다는 것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내 현재의 이유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면 두려움과 불안 속에 살게 됩니다. 내가 왜 사로잡히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둘째, 성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십니다. 진리의 성령에 감동하면 하늘 보좌에 앉으신 성부 하나님을 보여 주십니다. 이 땅 통치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통치의 원천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벽옥, 홍보석, 무지개 녹보석으로 묘사합니다. 로마 황제 보다 더 찬란한 보좌에 앉으신 이를 의미합니다. 계시록을 이렇게 비유로 쓸 수밖에 없는 환경을 알아야 합니다. 핍박으로 주님을 은유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를 왜곡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계시록이 가치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보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이 다스리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고난 중일 때 아니면 계시록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고난 받은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은 교회를 지키십니다. 우리는 그 분들의 눈물의 기도 덕을 보는 것입니다. 내가 고난의 불 속에서 단련되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나에게서 무지개 광채를 보게 됩니다.
셋째, 24장로가 하나님과 같은 반열에 있습니다. 24장로는 신구약의 대표를 의미합니다. 엄청난 대가를 주고 사신 백성의 대표가 거기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한 자는 24장로처럼 하나님 옆에 있게 될 것이며, 왕 같은 제사장으로 하나님과 함께 다스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격이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일 선상에 있다는 것입니다. 신구약 믿음의 대표자들은 다 간음, 살인, 배신 등 제대로 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과 함께 앉아 있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니까 하나님과 같이 앉아 있는 것입니다. 최고의 황금 면류관 쓰고 하나님과 함께 앉아 있더라 이 얘기입니다. 예수만 믿으면 이렇게 대단한 신분이 됩니다. 하늘 보좌를 사모하면서 나아갑시다.
넷째, 종말적 현상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은 구원하러 오시기도 하지만 심판하러 오시기도 합니다. 그럴 때 번개와 뇌성 같은 무서운 모습으로 오십니다. 종말론 사건이 왔을 때 하나님은 정확하게 심판하십니다. 구원 받은 자에게는 무서워 할 일 아니기에 말씀으로 인도하십니다. 악인의 입장에서는 종말의 심판의 사건입니다. 말씀의 능력이 악인에게는 번개와 뇌성의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똑같은 사건이 어떤 사람에게는 심판의 사건이 되지만 믿는 사람에게는 능력의 구원의 사건이 됩니다. 바람피우던 남편이 교통사고로 반신불수가 되었을 때 남편이 이렇게 밖에 구원을 얻지 못하겠구나 하고 기쁘게 생각하면 구원이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건 가운데 새노래, 구원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살아납니다. 사건 가운데서 겸손하게 내가 어떻게 살아났는지, 어떻게 기도하고, 회개하고 평강을 찾았는지, 그것이 마땅히 될 일이었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럴 때 비로소 새노래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