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눈물을 보았노라]
왕하 20:1~6
죽음은 늘 우리 곁을 소리 없이 지나가지만, 우리는 마치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처럼 무심히 살아가곤 합니다. 오늘 본문의 히스기야 역시 형통한 삶을 살던 중, 갑작스럽게 임한 사망 선고 앞에서 “왜 하필 나인가”라는 절규와 함께 통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눈물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도 우리 눈물의 이유가 무엇이든지, 하나님은 모든 성도의 눈물을 보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의 눈물을 보시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함께 묵상해 보겠습니다.
첫째, 최선을 다해도 죽음 앞에서는 통곡합니다.
유다의 왕 히스기야는 누구도 손대지 못했던 놋뱀을 부수고 산당을 제거하며 하나님만 의지했던 성군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신앙 개혁을 이루고 인생의 절정기에 올랐을 때,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죽고 살지 못하리니 집을 정리하라"는 청천벽력 같은 사망 선고를 내리십니다. 가장 칭찬받아야 할 순간에 찾아온 이 소식은 이해할 수 없는 절망이었습니다. 이처럼 죽음과 고난은 늘 예고 없이 찾아오며,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 쌓아온 삶의 이력서라 할지라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 힘을 쓰지 못합니다.
히스기야는 누구도 도울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나아가지만, 자신의 진실과 전심조차 죽음을 막을 수 없음을 깨닫고 심히 통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눈물 속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나라에 대한 염려도 있었겠지만, ‘최선을 다해 헌신했는데 왜 이런 결과가 오는가’라는 깊은 억울함이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옳다고 믿는 노력과 헌신이 인정받지 못할 때 억울함에 사로잡히며, 그 마음은 회개로 나아가는 길을 막습니다. 우리의 그 어떤 진심이나 선행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없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통곡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둘째, 통곡의 기도에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
히스기야가 통곡하며 기도하자, 이사야가 아직 궁을 벗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를 시작만 해도 이미 응답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응답이 환경의 변화나 즉각적인 치유가 아니라, 먼저 ‘말씀’으로 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해결보다 말씀을 먼저 주시고, 병을 고치시기 전에 사람을 먼저 고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를 단순히 한 개인이 아니라 다윗의 언약을 잇는 택자로 보시며, 그의 기도와 눈물을 모두 들으시고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논리적인 기도뿐 아니라, 말이 다 떨어진 자리에서 흘리는 눈물까지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기도를 잘하지 못해 그저 울기만 해도, 그 모든 기도를 하나님은 다 보고 들으십니다.
하나님께서 히스기야를 낫게 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단순한 생명 연장이 아닙니다. 3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게 하심으로 예배를 회복시키는 데 있습니다. 결국 기도의 응답은 눈앞의 문제 해결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경이 바뀌기만을 기다리기보다, 말씀이 임하기를 기다리며 큐티 책을 펴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거기에 내 사건의 해석이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응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언약 때문에 살리십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히스기야의 병을 낫게 하시는 것을 넘어 그의 수명을 15년이나 연장하시고, 더 나아가 앗수르의 침공에서도 예루살렘을 지켜주시겠다는 약속으로 확장됩니다. 이는 한 사람의 회복이 개인에 머무르지 않고 가정과 공동체, 하나님 나라까지 이어짐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통해 공동체를 살리시고, 한 사람을 세워 온 가족과 교회를 살리는 구원의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히스기야를 살리셨을까요? 단지 그의 간절한 기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과 다윗과 맺으신 언약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과 기도를 들으시지만, 구원의 근거는 우리의 진심이나 행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택자를 절대 버려두지 않으시고, 때로는 고난을 통해서라도 끝까지 붙드시며 구원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결국 구원은 우리의 공로나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과 언약을 걸고 이루시는 은혜입니다. 히스기야가 다윗 때문에 살았듯이, 우리는 십자가에서 언약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살아갑니다. 비록 우리는 매 순간 흔들리고 연약하지만,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침내 온전한 구원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한 집사님은 신생아실 주치의로 일하던 시절, 심한 기형이 예상된 태아를 낙태하는 과정에서 저질렀던 끔찍한 죄를 고백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앓고 있는 파킨슨병을 그 죄에 대한 결과로 여기며, 깊이 회개하셨습니다.
저 또한 산부인과 의사였던 남편의 구원을 위해 애썼지만, 정작 낙태를 막아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지 못했던 것을 돌아보게 됩니다. 남편이 마지막 순간 낙태죄를 콕 집어 회개하며 천국에 간 것은 저에게 말할 수 없는 회개의 무게로 남았습니다. 부부는 한 몸이기에 그 죄의 현장에 함께 있었던 저의 책임 또한 절대 가볍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제가 지금 영혼 구원을 위해 날마다 마지막인 것처럼 사명을 감당하고 있지만, 이것은 결코 생색낼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눈물로 회개해도 제힘으로는 이 죄를 갚을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감히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위해 세우신 언약 때문입니다. 제게는 아무리 통곡해도 내놓을 공로가 전혀 없고, 천국 가는 그날까지 회개해야 할 죄인 중의 괴수일 뿐입니다. 저의 이력서에는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기에, ‘저를 용서하지 마소서’ 하다가도 결국 ‘그래도 저를 좀 용서해 달라’며 은혜에 매달릴 뿐입니다. 부디 저의 회개가 여러분을 살리는 통로가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최선을 다해 살아보려 애써도 결국 죽음과 한계 앞에서 통곡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통곡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변치 않는 언약 때문에 우리를 다시 살리십니다. 이제 내 힘과 의지가 아닌,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붙드는 인생 되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