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명이라]
이성은 목사
막 14:54~62
할렐루야! 생명 낳는 그 한 사람을 살리는 우리들사회복지재단을 섬기고 있는 이성은 목사입니다. 우리들교회는 개척 때부터 지금까지 생명을 지켜 달라고, 낙태를 막아 달라고, 태아생명보호법이 제정되게 해 달라고 늘 기도해 왔습니다. 우리의 이런 기도와 적용이 쌓여서 담임 목사님께서 헌물하신 산부인과 병원 건물에 ‘우리들사회복지재단’이 세워졌습니다.
나라의 근간은 가정이고, 가정의 근간은 한 생명이라는 말씀처럼, 이제는 기도에 그치지 말고 행동으로 적용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사회복지재단을 세워 주셨습니다. 우리 재단은 위기 임산부의 출산을 돕고, 미혼모와 한부모 가정을 케어하며, 다음 세대가 생명을 지킬 수 있도록 교육과 문화 콘텐츠를 통해 생명 살리는 운동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재판을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모든 공회원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였지만, 예수님의 편에는 단 한 사람의 변호인도, 제자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홀로 이 외로운 싸움을 하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 가운데 생명을 낳고 지키는 일도 예수님처럼 외로운 길인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내가 죽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예수를 죽이는 현장에 누가 있는지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멀찍이 따라가는 베드로가 있습니다.
체포되신 예수님을 심문하기 위해 산헤드린 공회가 급히 열렸습니다. 한밤중인데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서기관들이 다 모였습니다. 이렇게 악을 도모하는 일에 하나가 되는데, 그 이유는 악의 목적이 나의 편의와 쾌락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습이 낙태를 찬성하는 이 시대와 너무나 닮았습니다.
우리나라는 1953년에 형법 제269조, 270조 ‘낙태는 범죄’라는 법을 제정했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부터 출산이 경제성장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정부가 산아 제한 정책을 펼쳤고, 낙태가 자연스러운 대처법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종교계 중심으로 태아의 생명을 최우선으로 하는 프로라이프(PRO-LIFE) 운동이 일어났지만,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태아의 생명보다 더 우선되어야 한다는 프로초이스(PRO-CHOICE) 운동이 더 힘을 얻습니다.
2019년 4월 11일 낙태죄가 헌법과 맞지 않다는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지며 국회는 낙태를 허용하는 법안을 계속 만들고 있고, 최근에는 만삭까지 낙태를 허용하자는 법안도 발의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를 죽이는 데 한마음이 되는 이유는 십자가보다 인권이 주는 쾌락이 더 달콤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재판장으로 끌려가는 현실을 보고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듯 우리도 원치 않는 임신을 하고 현실을 마주하게 되면 멀찍이 서고 싶습니다. ‘멀찍이’는 도망갈 거리를 확보해 놓고, 십자가를 질 때는 세상으로 도망치겠다는 것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고 하셨는데, 마지막 때에 생명을 살리는 우리들사회복지재단이 설립된 것은 하나님의 분명한 뜻인 줄 믿습니다.
둘째, 답정너 공회원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죽이려고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한밤중에 공회실이 아닌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 모였습니다. 이미 예수를 죽이기로 하고 형식적으로 증거를 찾기 위해 급하고 비밀스럽게 모인 것입니다. 이미 내가 옳다는 답을 정해 놓은 ‘답정너’ 공회원들을 증언해 주는 자가 많았지만, 그들의 증언들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찾아야 할 증언은 사람의 증언이 아니라 유일한 진리 되신 하나님의 증언, 말씀밖에 없습니다.
저는 사회복지재단을 섬기면서 멀리서 듣던 생명윤리의 문제, 낙태와 저출산의 문제 등 사회적 문제들을 현장에서 깊이 접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인권’이라는 답을 정해 놓고, 어떤 명분으로 생명을 죽일지 합리화하고자 증거를 찾기에 급급한 모습입니다. 인간의 기준과 결정은 모두 제각각이라서 일치가 안 됩니다. 그래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의 말씀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셋째, 생명을 살리는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거짓 증언이 난무하는 공회에서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십니다. 억울함을 해결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해결하는 게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긴 침묵 속에 계셨던 예수님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는 질문에 “내가 그니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앞에서는 침묵할 수 없습니다. 침묵할 때와 침묵하지 말아야 할 때를 알아야 하는데 그 기준은 오직 구원입니다.
제가 죽이려고 했던 생명은 저의 아버지입니다. 제가 열 살 때 아버지는 큰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셨고, 때마다 식사를 챙겨 드리고 대소변을 갈아 드리며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자세를 바꿔 드려야 했기에 항상 족쇄를 차고 사는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를 보며 ‘이렇게 사람 구실도 못 하는데 살아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36년이 지난 지금, 우리 가족은 모두 예수님을 너무 잘 믿고 있습니다.
저는 교통사고 현장에서 피범벅이 된 아버지를 직접 보면서 하나님이 두려운 분이신 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제가 이렇게 주의 종이 되지 않았는지 생각합니다. 제 동생은 아버지 병시중의 겸손한 환경에서 훈련이 잘 된 건지 남편과의 엄청난 갈등에도 끝까지 이혼 얘기를 하지 않았고, 지금은 부부목장에 딱 붙어 가고 있습니다. 감당 안 되는 십자가를 지고 살아내신 어머니는 “내가 죄인이지”를 입에 달고 사십니다.
시체처럼 누워 쓸모없어 보였던 아버지의 생명이 엄청난 구원의 사명을 감당하고 계셨습니다. 이렇듯 내가 생명을 살려주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나를 살려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명을 죽이는 현장에는 멀찍이 따라가는 베드로가 있고, 답정너 공회원이 있으며, 생명을 살리는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우리가 생명을 낳고 낙태를 하지 말며 아픈 식구들을 끝까지 품고 가야 하는 이유는 오직 구원 때문입니다. 오늘도 맡기신 한 생명을 살리는 적용을 하고 생명을 낳고 지키는 구원의 사명을 감당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