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에]
김성우 목사
행 8:1b~8
여러분, 그날은 스데반이 순교한 날입니다. 죽음과 비통의 날이었지만, 성경은 그의 죽음을 자니라고 기록합니다. 단순히 숨을 거두었다가 아니라, 깊은 수면에 빠지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성경은 성도의 죽음을 자주 잠으로 말합니다. 창세기에서는 야곱이, 신명기에서는 모세가, 사도행전 13장에서는 다윗이 잠들었다고 기록됩니다. 신약에서도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과 나사로의 죽음을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의 죽음을 잠이라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자는 자가 반드시 깨어나듯, 주께서 마지막 날 우리를 깨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며, 반드시 이어질 부활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성경은 잔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날은 단지 슬픔의 날이 아니라 부활이 임하는 날, 다시 만남을 소망하는 생명의 날입니다. 오늘은 우리 삶에 그날, 부활의 날이 임하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함께 묵상하겠습니다.
첫째, 큰 박해가 있습니다
사도들에게 예루살렘은 종착역이 아니라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이후 설교 한 번에 삼천 명, 오천 명이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고, 그들은 이 놀라운 부흥에 안주하며 떠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마지막 명령은 분명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1:8)' 그러나 제자들은 예루살렘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흔들어 깨우시기 위해 큰(메가스) 박해를 허락하셨습니다. 그 결과 사도 외의 모든 성도가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졌습니다. 여기서 흩어지다(디아스페이로)는 농부가 씨를 흩어 뿌리는 행위를 뜻합니다. 씨앗은 수동적으로 흩어지지만, 농부는 능동적으로 뿌립니다. 곧, 흩어짐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파종이었습니다. 이 박해는 자기중심성을 깨뜨려 지경이 넓어지는 계기가 됩니다. 우리 안의 고집과 집착이 깨질 때, 말씀의 생명이 타인에게 흘러갑니다. 마치 알이 깨져야 병아리가 태어나듯, 나의 세계가 깨져야 새 생명이 나옵니다. 개인도, 교회도 박해를 통해 깨어질 때 비로소 땅끝까지 나아갑니다. 사도행전 11장에 기록된 안디옥 교회는 바울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그 놀라운 확장은 바로 이 깨뜨림의 열매였습니다. 잘 당하고 잘 흩어지는 것, 이것이 디아스포라의 삶입니다.
둘째, 큰 울음이 있습니다
본문 2절에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기록합니다. 여기서 크게는 #039메가스#039, 울다#039는 #039코페토스#039로 가슴을 치며 통곡한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율법과 공회 판결에 따르면, 사형선고를 받은 자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로 간주했기 때문에 울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이익을 무릅쓰고 스데반과 함께 통곡했습니다. 장사하고는 단순히 시신을 처리한 것이 아니라 함께 짐을 지다, 함께 가겠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나도 저와 같은 죄인입니다. 나도 그 길을 따르겠습니다.라는 회개적 연대의 울음이었습니다.
눈물은 고장 난 감정을 회복시키고, 하나님을 향한 심장을 다시 뛰게 합니다. 그러나 공감이 결여된 관료적 성실성은 악을 낳습니다. 빌라도가 예수께 죄가 없음을 알면서도 자리를 지키려 십자가에 넘긴 것이 바로 그 예입니다. 악의 평범성은 성찰과 공감이 결여된 열심에서 비롯됩니다.
사울은 교회를 잔멸했습니다. 이 단어는 멧돼지가 포도밭을 짓밟아 열매가 터져 피처럼 흩날리는 광경을 묘사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사울이 훗날 바울이 되어 복음을 전했습니다. #039누가#039는 사울의 과거를 숨기지 않고 기록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고통과 눈물이 구속사의 일부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짓밟던 사람이 오히려 구원의 도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큰 울음은 단순한 비탄이 아니라, 결국 새로운 사명을 낳는 눈물입니다.
셋째, 큰 기쁨이 있습니다
박해와 울음을 지나 흩어진 무리가 복음을 전하자, 본문은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라고 증언합니다. 그 성은 바로 사마리아 성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는 멸시의 땅, 발조차 들이고 싶지 않은 경계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사도가 아닌, 이름 없는 평신도 중 한 사람인 빌립이 복음을 전하자, 귀신들이 떠나가고 병든 자들이 나음을 얻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지위가 아니라, 전해진 메시지였습니다. 초대교회의 복음은 한 가지, 곧 잘 살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우리의 구주 되신 그리스도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 우리 삶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오늘 공동체 고백은 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몇 년 전, 아버지가 큰 교통사고를 당하셨다는 긴급한 전화를 받았습니다. 크게 다치신 아버지를 모시고 갔던 여러 병원에서 네 번이나 거절당하며 쫓겨나는 일을 겪었습니다. 휠체어를 밀고 검사실을 오가며, 바닥에 흘린 소변을 닦고, 욕설과 행패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큰 박해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병원을 전전하던 어느 화창한 오후, 차 안에서 아버지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고, 그 눈물 앞에서 아버지의 고단한 인생이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용기를 내어 물었습니다. 아버지,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그러자 아버지는 짧게 대답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그 순간, 오랫동안 사마리아 같았던 아버지와의 경계가 무너지고 용서가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 장례 마지막 날, 큐티 본문은 자는 자들에 관하여amphellip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 4:13ampndash14)'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의 죽음을 잠이라 불러 주셨고, 그 믿음 안에서 큰 기쁨을 허락하셨습니다. 사마리아에 임한 기쁨은, 큰 박해와 큰 울음을 통과한 순종의 열매였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시작된 그날은 눈물로 이어지고, 마침내 기쁨으로 완성됩니다. 부활의 생명은 이렇게 흩어진 증인들을 통해 땅끝까지 확장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큰 박해로 우리를 깨뜨려 흩으시고, 큰 울음으로 서로의 짐을 지게 하시며, 마침내 큰 기쁨으로 위로하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예루살렘을 넘어 사마리아와 땅끝을 향해 나아갑니다. 큰 박해 가운데 자아가 죽어지고, 눈물 속에서 연대하며, 결국 복음 전하는 큰 기쁨의 사명으로 서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