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걸으라]
김성우 부목사
행 3:1~10
많은 분이 다음 설교자가 누굴까 궁금했을 텐데, 사도 맛디아처럼 제비 뽑혀 말씀을 전하게 된 김성우 목사입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살던 고향도 환상의 섬으로 불리었지만, 모든 비극이 저희 가정에서 일어났었습니다. 오늘 이 예배 자리에도 인생의 비극에 주저앉은 한 사람이 있을 줄 압니다. 말씀을 통해 평생 주저앉은 한 사람이 어떻게 비극의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을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구걸하는 인생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죽으시고 오십일 만에 성령이 임함으로 첫 교회가 세워집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믿는 자 삼천 명이 몰려드는 놀라운 은혜 가운데서도 여전히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갑니다. 성전에 올라가다는 미완료 과거형으로,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꾸준하게, 습관적으로 예배드리러 올라간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들교회는 이번 여름 3,500명의 성도님들이 국내외 Think Trip과 큐티 페스티벌에 동참하여 죄 고백의 간증과 물질과 시간을 다른 사람들에게 흘려보내는 큰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이 후로도 우리는 여전한 방식의 목장과 예배와 기도 시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어머니의 배에서 나면서부터 한 번도 일어선 적이 없는 한 사람이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합니다(2절). 원치 않는 모습으로 태어나 원치 않는 일, 곧 구걸을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던져져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같습니다. 평생 성전을 등지고 금과 은으로 치장된 성전 미문 앞에 앉은 그는 일을 해서 돈을 벌 수 없음을 알았기에 창피함을 무릅쓰고 구걸합니다.
구걸의 헬라어 뜻은 하나님의 성품, 곧 자비, 동정, 긍휼을 담고 있습니다. 성전 문 앞 거지는 이것들이 인간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것임을 알았고, 이렇게 자신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사람은 내가 할 수 있다는 사람입니다. 구걸하는 대상을 바로 알면 구걸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구하면 구걸이지만, 하나님 아버지께 약속으로 구하면 기도가 됩니다. 주님, 제가 앉은뱅이입니다. 제 힘으로는 일어설 수 없습니다.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날 때부터 앉은뱅이요 뼛속까지 죄인임이 인정되는 사람만이 이렇게 구할 수 있습니다.
둘째, 더불어 주목해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갈 때 구걸하는 앉은뱅이 거지가 먼저 그 둘을 바라봅니다. 본문에 보다라는 동사가 네 번 등장하지만, 원문에서는 각각 다른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4절의 주목한다는 헬라어 아테니조로,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눈여겨 집중하여 바라본다는 뜻을 지닙니다. 베드로는 날 때부터 앉은뱅이로 평생 성전 문 앞에 앉아 구걸하는 그 사람을 요한과 더불어 주목합니다.
아테니조는 구약에서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언약의 돌판을 가지고 내려올 때, 신약에서는 하늘로 올라가는 주님의 영광을 자세히 볼 때 쓰였던 단어입니다. 요한과 베드로가 더불어 그 사람을 하나님처럼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단하고 성공하고 멋있어야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구름에 가려진 것처럼 쉽게 보이지 않기에 자세히 봐야 합니다. 내 옆에 쓸모없게 여기는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숨어 있습니다. 사람에게 구걸할 수밖에 없는 앉은뱅이 거지와 같은 내 인생을 영화로우신 하나님께서 아테니조, 곧 주목하여 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바라봄이 우리를 일으킵니다.
저는 알코올 중독으로 매일 저에게 돈을 구걸하던 아버지를 원망하고 증오했습니다. 저의 사역에도 걸림돌 같은 존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교회에 와서 말씀으로 제 안의 죄악을 직면하고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닫자, 그제야 아버지를 아테니조 할 수 있었습니다. 버리고 싶던 아버지 속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숨어 있음을 보게 된 것입니다.
가족은 나의 거룩을 위해 내 옆에 묶어 주셨기에, 더불어 주목하여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실수하고 죄짓고 넘어질 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자녀로 바라보시며, 우리를 다시 세우실 뿐 아니라 이웃을 일으킬 힘을 주십니다.
셋째,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손을 잡아 일으켜야 합니다.
앉은뱅이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동전 한 닢 얻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그들을 바라봅니다.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하며 그의 오른손을 붙잡습니다.
황동문에 이중문으로 은과 금으로 씌어진 미문(Beautiful Gate)은 성전에 들어가면 은과 금을 주는 것처럼 믿게 합니다. 예배드리면 은금이 생기고 잘될 거라 생각하지만, 베드로는 무시당하고 멸시받는 이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한 사람을 일으킵니다.
나사렛은 예수님이 나고 자란 작고 초라한 마을입니다. 아름다운 것이 아닌 나의 가장 낮고 추악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사람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갈릴리 어부이며 바다를 잘 아는 베드로가 물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높은 풍랑이 이는 것을 보며 두려워 주님, 살려주시옵소서. 주님, 제가 죽게 되었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주님이 베드로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붙드셨고, 그 은혜를 기억한 베드로도 앉은뱅이 거지의 손을 잡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실패와 아픔을 아시는 주님은 우리의 손을 놓지 않으십니다. 오늘 이 시간, 그 손을 다 붙잡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공동체 고백입니다.
지난주 저는 한 집사님이 계신 목장에 심방을 갔습니다. 이 집사님은 아내와 갈등 끝에 접근 금지 명령을 받아 집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억울함 속에 지내고 있었습니다. 목장에서는 말씀을 잘 들을 수 있도록 목장 식구들이 작은 부분까지 도와주며 곁을 지켜 주었고, 또 같은 아픔을 겪었던 다른 집사님의 간증을 들으며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혼자 밥을 먹던 이분이 목장 밥상에서 함께 울고 웃으며 마음을 열고, 결국 아내에게 용서를 구하겠다고 적용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주일 성수를 하지 못하던 분이 이번 주 예배에 직접 참석하며 회복의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앉은뱅이처럼 스스로 일어날 힘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일어나 성전으로 들어가라고 오른손으로 붙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나 홀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 옆에 쓰러질 수밖에 없는 한 사람을 손잡아 일으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간증으로 함께 들어가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더불어 바라보며 손 내미시는 한 주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