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왕하 16:1~9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아하스 왕인데, 그의 인생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다윗과 같지 아니한 인생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반면교사 삼아 따르지 말아야 할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늘은 우리가 2025년 한 해의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본문 가지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윗과 같지 아니한 인생은 이렇습니다.
첫째, 영적 질서를 비틉니다.
아하스 왕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버지 요담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지만, 아하스는 이스라엘의 여러 왕의 길로 행하며 가증한 일을 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인신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하스는 열등감이 커서 피해의식이 있었는데 이런 사람에게 권력이 가면 이런 일이 생기게 됩니다. 또한, 산당과 모든 푸른 나무에서 제사를 드리며 우상숭배를 부흥시켰습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위에 두었고, 이는 교만의 결과였습니다. 아하스가 자란 환경을 생각해 보면 아버지 요담이 일군 부강한 환경에서 자랐는데, 성전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녀에게 필요한 최고의 환경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환경입니다. 부모가 직접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아하스의 영적 질서가 뒤틀린 원인은 성전에 들어가지 않은 요담에게 있습니다. 자식을 우상의 제물로 드리는 게 아하스가 자기 왕위를 위해서 결국은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고 우상의 제물로 나의 노후보장, 입신양명을 위해서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 이기지 못하고 빼앗깁니다.
엘랏은 웃시야 시대의 회복과 번영을 상징하는 곳인데, 오십 년도 지키지 못하고 잃어버립니다. 아하스 때 예루살렘이 포위되는 최대 위기를 맞습니다. 그냥 포위만 당한 게 아니라 큰 살육이 있었고 무려 12만 명이 죽고, 20만 명이 북이스라엘 사마리아로 끌려갔습니다. 예배가 실종된 아하스는 결국 하나씩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세상 다 갖추었어도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않으니까, 다윗과 같지 아니하니까, 결국은 능히 이기지 못합니다. 사실 다윗을 다윗 되게 하는 것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입니다. 바로 하나님께 돌이키는 회개입니다. 밧세바 사건 후에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들은 다윗은 무소불위의 왕이었습니다. 귀를 막아도 이상할 게 없고 나단 선지자를 쫓아내고 체포해도 문제 될 게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화께 죄를 범하였다며 분수령적인 회개를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구부러지지 않은 정직한 길이고 바른길이고 진실한 길입니다. 그런데 아하스는 이 영적 질서를 완전히 비틀고 자신을 하나님 자리에 놓았습니다. 2025년 표어 돌이키고 살지니라 이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모든 가정과 목장에 교회에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말씀이 들리는 선택, 곧 회개를 해야 합니다.
셋째, 해석보다 해결을 구합니다.
아하스 왕은 문제 해결보다 해석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의 공격을 받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셋에게 왕궁과 성전의 헌금을 뇌물로 바치면서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다윗의 후손인 아하스가 하나님을 얼마나 가벼이 여기는지, 앗수르를 하나님보다 얼마나 더 두려워하는지 보여줍니다. 아하스의 뇌물을 받은 앗수르 왕은 아람을 공격해서 다메섹을 점령하고 아람 왕 르신을 죽였습니다. 하지만 뇌물을 받고 아람을 공격해서 이기니까 앗수르가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유다도 점령해야겠다고 생각한 그들은 군대를 남하시켜 예루살렘을 공격했습니다. 뇌물로 앗수르를 살 수 있으리라는 아하스의 기대가 빗나갔습니다. 여러분, 뇌물을 주는 순간부터 을이 되는 걸 아셔야 합니다. 항상 정직하게 행해야 하는데 이렇게 비틀고 꼬고 이러니까 그다음부터 끌려다니는 겁니다. 항상 욕심을 버리고 원칙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사야 7장에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베가와 아람의 르신 동맹군의 공격을 받기 전에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아하스에게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적들이 엄청난 기세로 몰려오는 사건이 멸망의 사건이 아니고 구원의 사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빨리 회개해서 돌이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택자에게 사건만 주시지 않고 늘 말씀을 주십니다. 우리가 손에서 성경을 놓지 않고 매일 큐티인으로 여전한 방식으로 묵상하는 것 자체가 우리가 하나님의 택자라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문제 해결 수준이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 문제의 연속이 우리 인생입니다. 가치관이 바뀌지 않으면 돈이 아무리 많아도 해결해도 안 됩니다. 말씀으로 내 인생을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하스는 북이스라엘의 오뎃이 해석해서 갖다준 이것도 듣지 않고 대선지자 이사야가 바로 앞에서 말씀을 전해주는데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냥 당장 눈앞의 위기와 문제를 해결하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성전의 헌금까지 다 털어서 앗수르 왕에게 바치고 속국, 노예가 됩니다. 그런데도 나중에 보면 이 가장 악한 왕이 예수님의 족보에는 올라갑니다. 그러니까 행위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문제는 해석하라고 오는 것이지 해결하라고 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대단하게 보지 않으십니다. 문제를 주시면서 꼭 답지도 함께 주십니다. 우리는 말씀이 알려주시는 것만큼 적으면 되고 그게 해석입니다.
광주 한 목자님의 공동체 나눔입니다. 남편의 외도와 아들의 힘든 사춘기를 빌미로 이혼도 재혼도 할 수 있다고 했는데, 남편의 외도 때 이 세상에서 땅끝까지 갔다고 생각해서 심장이 구멍에서 피가 흐르는 것같이 아프셨다고 합니다. 아들에게 아빠 때문에 얼마나 힘든지 아냐며 정서적으로 학대했는데, 그때마다 아들은 '엄마 제가 있잖아요'라며 위로해 주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춘기가 오고 자아가 생기니까 아들이 저한테 욕하고 남편과 똑같이 자기한테 뭐 해준 게 있냐고 하며 엄마가 아빠를 싫어하니까 아빠를 좋아하는 표현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짜 학대였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새해를 시작하면서 해결만 구하는 삶에서 먼저 말씀으로 해석하기를 힘쓰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다윗과 같이 돌이켜 사는 팔복을 이번 한 해 풍성히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