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는 나를 실족하지 않게 하시는 분임이 인정됩니까?
오늘 본문 구절 중에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구절에서 이것의 의미는 장차 받을 환란을 의미합니다. 계속해서 이것을 말씀하시는 이유는 제자들이 실족하여 믿음을 잃게 하려 하지 않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어찌보면 제자들 입장에서 나를 믿으면 고난과 환란을 받을 수 있어 라고 이야기 해주시는 것도 훗날 제자들을 위해 미리 안전장치를 해두시는 것 같은데 그러면 주님께서는 나를 실족시키지 않기 위해 어떤 안전장치를 해주시는지 한번 묵상해보았습니다.
항상 담임목사님과 주변 지체들을 통해 공통적으로 들었던 이야기가 있는데 고난이 없는게 더 문제야 라는 것이었습니다. 담임목사님도 그렇고 친하게 지내던 다른 목자형도 만약 내가 고난이 없으면 다시한번 신앙을 점검해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때 이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에 나는 교제도 안되고 마음은 불안하고 조급한데 이런 고난이 없는게 축복 아니냐고 사람 농락하냐는 생각이 들어 마음속에서 분이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당시 이말을 제게 했던 목자형에게 분노를 쏟아내었습니다. 형이 내 마음을 아냐고 내가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결국 나는 버림받는데 나는 그러기가 너무 싫다고 하면서 목자형과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정말 당시에는 하루하루 조급한 마음으로 살았던게 폭주기관차를 승차한 기분이었습니다. 기도를 해도 나아지는것이 없으니까 그냥 꾸역꾸역 버티다 보니 그 지옥같던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코로나 기간도 넘어가고 이직의 시간도 통과하고 정신과에서 우울증 판정을 받고 정신과 약을 먹으면서 하루하루 살고 제가 교회에서 있던 시간을 돌이켜보니 당시에 내가 이 고난의 시간들을 어떻게 통과했지 라는 생각도 들고 그 고난의 시간을 통과하니 누리지 못했던 평안과 안정을 누리고 그토록 하고 싶었던 신교제도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저를 실족시키지 않게 해주신 안전장치는 바로 저 자신을 직면하는 시간이었던것 같습니다. 겉으로는 강한척했지만 속마음은 언제 터질줄 모르는 폭탄을 안고 살아갔기에 누군가를 만나 사랑할 여유도 관계부분에서도 항상 불안했기에 이런 시간을 허락해주셔서 제가 실족하지 않게 저에게 사람들을 붙여주셔서 지켜주신것이 이제서야 해석이 되어집니다. 이런 경험을 해보니 어떤시련이 와도 딱풀성도처럼 말씀과 공동체에 붙어있는것이 성도로서 해야될 사명이라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언젠가 어떤 종류의 고난이 올지 모르지만 괴롭다고 해서 도망치지 않고 주신 고난이 훗날 저를 지키기 위한 안전장치임을 기억하면서 하루하루 잘 살아가는 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적용하기
당장의 고난이 이해가 안되더라도 '언젠가 이해할 날이 오겠지 하며 딱풀성도처럼 잘 붙어가겠습니다.'
오늘 큐티하면서 제 나름의 해석을 한것은 지금의 고난은 훗날 찾아올 환란을 대비한 안전장치인것 같습니다. 당장 그 고난이 이해가 안되더라도 예배와 공동체를 떠나지 않고 딱풀성도처럼 제 자리를 지키는 것이 제가 할수 있는 적용인것 같습니다. 당시 이해가 안된다고 공동체도 소용없다고 불평했던 시절을 반성하며 큐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