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가 생각하는 단어, 죽음
작성자명 [김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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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5.09.21
요즘 내가 생각하는 단어는 죽음이다.
변하지 않는 나의 모습에 대한, 해법으로 죽음이란 것을 생각한다.
변하려고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처방이다.
지금까지 내가 생각하는 광야는 긍정적 의미의 단어였다.
광야생활을 통해서 훈련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광야를 제일 빨리 통과하는 것은 순종이라고 생각하여, 광야의 패스워드로 7140을 말하곤 했다.
40년을 돌고 돌아서 가는 것이 아니라 순종함으로 7일이면 가나안을 갈 수 있다는 것의 의미였다.
그러나 이젠 광야를 통과하는 것은 죽음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광야에서 구름기둥으로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을 수는 있었지만,
결국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뿐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죽어야 했다.
광야를 거쳐서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마지막 한 사람까지 죽는 시간이 광야 40년의 세월이다.
순종이냐 불순종이냐를 떠나서 죽어야 할 사람들이 죽어야 했던 것이다.
육이 죽지 않으면 영의 성장이 없기 때문에 늘 광야에서 헤맬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제는 광야의 패스워드는 죽음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변화는 죽음에서 시작된다.
육의 죽음이 없는 곳에 영의 삶은 없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것이 세례의 의미가 아닌가?
변화는 죽음에서 시작되고. 죽음은 광야에서 일어난다.
애굽이란 세상을 나와서 육적 그리스도인이 거쳐가는 곳이 광야다.
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 광야에서의 죽음이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곧바로 가나안으로 이끄시지 않으셨다.
왜 그랬을까?
지끗지끗한 애굽의 세상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직행노선을 택하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는 죽어야 할 육의 죽음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말씀을 들을 준비를 시키기 위함이 아니였을까?
육적인 삶은 갈등충만의 삶이다.
욕망이 숨쉬고, 순종하겠다고 하지만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 광야에서의 일상이다.
오죽했으면 7일이면 갈 수 있는 길을 40년이란 기간 동안 돌고 돌았을까?
그래서 광야는 죽어야 통과할 수 있는 곳이다.
빨리 죽으면 죽을수록 가나안을 가기 쉽다.
영적인 삶을 살기 위해 가장 빨리 죽는 자가 가장 현명한 사람이다.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 라고 했다. 바울같은 사람도 매일 죽어야 했다.
하물며 나라는 사람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죽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광야생활을 끝낼 것인가?
어떻게 하면 영적인 삶을 살 것인가?
어떻게 하면 말씀만으로 충분한 삶을 살 것인가? 그래서 죽고자 한다.
어떻게 죽어야 할까?
오늘 아침 기도라는 답을 찾았다.
변화를 위해서 죽고자 했고, 죽을 방법을 찾다가 기도라는 단어가 떠 오른 것이다.
야곱은 에서를 만나려 갈 때에 벧엘에서 기도했다.
욕심으로 가득찬 야곱이, 에서가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가운데 벧엘에서 기도를 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했다.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야곱도 예수님도 죽음 앞에서 멈칫했다.
죽기 싫어하는 것이 육이다. 그래서 죽지 않는 것이 육이다.
내 힘으로 죽을 수 없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기도를 통해서 나타난다.
기도를 통해서 죽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
에서의 마음을 풀어주고,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하게 하시고, 기꺼이 죽을 수 있는 곳을 향해 가도록 한다.
기도는 육을 죽이고 영의 길을 여는 통로다.
육이 죽으면 말씀이 나를 변화시킬 것이다.
그러면 광야를 지나 가나안을 향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젠 광야에서 죽고 가나안에서의 도전을 하고 싶다.
영적인 삶을 살고 싶다.
지금까지의 갈등의 삶을 접고, 허상과 같은 가짜 삶을 접고 말씀 안에서의 진짜 삶을 살고 싶다.
앞으로도 날마다 죽기위해, 죽는 방법을 연구해야겠다.
잘 죽는 자가 잘 살기 때문이다.
죽음이 없으면 부활도 없기 때문이다.
죽음이 없으면 말씀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변화는 죽음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