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눈물보기가 힘들어졌다.감동적인 설교를 들으면서도,고개를 까딱이는지는 모르겠지만,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는다.가슴을 치며 통애하면서도,죄를 자복하는 회개를 하면서도,크게 고함을 지르는지는 모르겠지만,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는다.입으로는간절히, 간절히, 간절히란 용어를 반복, 반복, 또 반복하면서도어찌된 판인지 도무지 눈물이 보이지 않는다.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는,눈물이 메마른 간절함이 언제부터인가 당연시되고 있다.오죽했으면 울음꾼을 불러오라 했을까.오죽했으면 애곡전문가를 불러와서 우리를 대신해 울게하라고 했을까.예레미야 9장 17-26절을 보며, 눈물 한방울을 묵상한다.남의 얘기가 아니다.지금 한가하게 남의 동네 말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내 얘기다. 내 말이다. 내가, 나 자신이 그렇다.전에는 안그랬는데,혼자서 기도하며 눈물도 꽤나 흘리곤 했었는데,언제부터인지 내가, 내 마음이 돌처럼 굳어지고 딱딱해져가는 것같아 두렵다.말뿐인, 글뿐인, 기껏해야 얄팍한 감정뿐인 신앙이 될까봐 두렵다.누가복음 15장 탕자비유가 생각난다.집떠난 작은 아들은 그렇다 치더라도,집안의 큰 아들 역시 탕자였다.그는,화석화된 신앙,감사와 감동,눈물이 말라버린 바짝 메마른 화석화된 신앙을 가진 탕자였다.우린 그에게서 눈물 한방울 보지 못한다.집떠난 동생이 구사일생으로 돌아왔어도,그래서 아버지가 껴안고 펑펑 울고 있어도,그의 눈에선 눈물 한방울 흐르지 않았다.화석화된 믿음, 돌처럼 납처럼 굳어버린 딱딱한 믿음의 탕자였다.두렵다.내가 그리될까, 내 신앙이 매너리즘에 빠질까.말씀 읽으면서도, 기도하면서도, 찬양하면서도눈물 한방울 흘리지 못할까 두렵다. 그런 굳은 사람이 될까 두렵다.그래서 또 아버지를 부른다.오늘도 지켜주소서.굳이 곡하는 사람을 불러오지 않아도,돈을 주고 사오지 않아도,내 눈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눈물을 회복하는 믿음 갖게 해달라고 또 아버지를 부른다.그 마음으로, 그 믿음으로 수욜의 하루를 또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