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고 가는 십자가
작성자명 [이혜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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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5.08.24
신선한 가을 바람이 코끝으로 파고드는 새벽, 동네를 한바퀴 돌았습니다.
더벅머리에 갓 깨어난 부시시한 얼굴과 무릎이 다 튀어 나온 츄리닝 바지와
그렇게 안걸을려고 무진 애를 써도 어느새 팔자걸음으로 걷고 있는 저의 모습도 다 잊은 채
걸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하고 신기한 일입니다.
긴 밤을 잘 보냈구나 하는 안도감과 몇 시간이라도 눈을 붙일 수 있었다는 승리감과
기침이 많이 줄어 들었나봐 목이 안 아픈걸 보니 하는 마음들.
두서 없지만 걸으면서 내가 살아있어서 이렇게 새벽의 공기를 마실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짤막하게 하나님께 드립니다.
어젠 참 힘든 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직장이 쉬는 날이라 저의 손과 발이 되어 준 혜경언니의 수고로,
까딱하면 가지도 못하고 돌아설 뻔 했던 병원까지 무사히 잘 다녀왔습니다.
몸 상태를 말씀드리니 폐렴 증상이 보인다 하시기에 가슴 사진을 찍고 다음 화요일에
다시 병원에 오랍니다.
그리고 항상 체온계를 곁에 두고 38도만 되도 당장 병원으로 와야 한다 하십니다.
폐렴때문에 2달여나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말도 못하고 고생한 분도 보았고 결국은 그것 때문에 호흡곤란으로 돌아가신 분도 보았기에, 정말 저의 생명을 향한 줄달음은 산 넘어 산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 비로서 본격적인 투병이 시작된 느낌입니다.
나날이 떨어져가는 먹는 것에 대한 욕구와 갈망도 제겐 넘어야 할 산 중의 태산입니다.
항암 받을 때도 먹는 것 때문에 힘이 든 적이 많았지만 지금은 그에 비할 수 없을만큼
힘들고 괴롭습니다.
밥을 앞에 두고 사느냐 죽느냐를 결단하는 그런 비장한 마음이 상상이 가시는지요?
이 것을 안 먹으면 난 지금 생명을 포기하는거야 하는 그런 마음.
그러니 더더군다나 맛 없는 밥이 맛이 있을턱이 없습니다.
아, 다 씹어서 고운 가루로 빻아 그냥 목에 흐스꼽고 집어 넣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들고.
가끔 먹다가 괴로우면 울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기도합니다.
아버지, 저의 죄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저의 교만을 용서 해 주세요.
아버지께서 생명 살리라고 주신 몸뚱이 가지고 헛된 곳에 다 쓰고 이렇게 병든 몸이 되어
밥 한 톨 넘기는 것이 괴로워 죽고 싶다는 한숨에 절어 있는 저,
차마, 어떻게 해주세요라고 말씀드리기에도 너무 송구스런 저의 죄를 있는 그대로
내어 놓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병의 원인도 내게 있고 이 지경까지 오도록 한 것도 다 저의 죄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저 저의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해 금쪽같은 자녀가 이렇게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지켜 보고 계셔야 하는 수고를 하시고 계십니다.
병의 원인을 -영적 , 육적 모두 - 알면 병을 이길 수 있다고 목사님께서 그러셨는데,
그렇지 아니할찌라도 병든 육신 앞에서 제가 100% 죄인인 것을 날마다 보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복내에서 갑작스럽게 나올 때만 해도 식욕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기력이 없다는 것외엔
특별히 아픈데는 없었기에-허리는 원래 불편했었지만-서울에 가서 잘 먹고 쉬면 금방
회복되겠지 하는 마음이 었습니다.
한 달에 한번씩 서울에 들러 교회에 가면 모두들 더 건강해 보인다는 말을 들었었거 내
스스로 느끼는 몸의 상태도 역시 그러했던지라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했었는데,
하나님이 계획은 그것이 아니었나 봅니다.
그래서 서울에 올라 온지 하루만에 병원에 실려 가는 신세가 되었을 때 아, 이 몸으로
어떻게 사람들을 만나지? 날 보면 뭐라고 할까? 아, 정말 싫다.
결국, 좋은 것만 보이고 싶었던 저의 욕심을 하나님은 먼저 간파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15년 생명 연장받고 부귀와 영광이 극에 달했던 히스기야가 하나님이 그에게 베푸신 이적을
보고자 방문한 바벨론 왕 측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하기 보단 자신의 재물을 보여 주기에
급급한 나머지 죄를 범하고 마는 것처럼 저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의 그런 마음을 아시고 병원에 힘없이 누워 있는 모습으로 사람들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가장 약한 모습으로 저를 다시 제 자리에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의 교만과 죄를 보게 하셨습니다.
어디까지 내려가야 이 교만의 죄는 힘을 잃어 버릴까요.
하긴 깊은 산골의 복내까지 내려가서도 힘을 잃지 않던 교만인 것을요.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아프고 연약하고 고통 받는 모습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교만의 쓴뿌리를 제거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그 분이 나를 사랑하시는 방식은 언제나 이랬던 것 같습니다.
알면서도 기억 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늘 망각하며 사는 저의 믿음 없음을 회개합니다.
고통 속에서 나의 낮아짐을 허락하신 하나님,
이 고통과 아픔은 저의 믿음을 재는 저울과도 같기에 거부할 수도 멀리 떠날 수도 없습니다.
가장 가까이서 싸매어 주며 함께 걸어가야 할 내 어깨에 매여있는 십자가가 아니라
내 심장 가장 가까운 곳에 안고 가야 하는 사랑의 십자가이며 운명입니다.
이렇게 귀한 십자가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