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과 상관없는 넋두리
작성자명 [서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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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5.08.13
이리저리 체널을 돌리다 우연히 EBS에서 김용옥교수(현재는 교수가 아니지만 적당한 존칭이 없어서)가 나와 광복의 의미를 재해석하는 프로를 보았습니다. 별로 재미가 없어 보여 제목만 보고 채널을 바꾸어버렸지만 한 때 저는 김용옥 교수의 팬이었습니다.
그의 책과 강의들을 열심히 듣고 읽었었는데, 그를 통해 ‘동양학’의 개념들이 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동양학”과 “서양학”은 서로 달라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지 않습니다.
제가 받아온 교육도 서양학에 입각한 교육이었고, 그런 관점때문에 동양학은 잘 들리지가 않았습니다. 김용옥 교수는 서양적 개념과 동양적 개념을 대비시켜 설명함으로 이 두영역이 서로 통하게 하여 주었습니다. 그의 강의와 글들을 읽으면서 동양학의 세계가 이해되기 시작했었습니다.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잇는 다리를 그가 놓은 셈입니다.
유교나 도교로 대표되는 동양학의 세계를 조금 알게 되면서 동양학, 특히
유교는 행위를 통해 선(善)에 이르고자 하며 그렇기 때문에 대단히 “율법적”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유교의 많은 행동지침들을 보며 아하, 이들도 죄에서 건짐 받고자 이리 몸부림하였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자신이 주인이 되는 서양 근대철학에 비해,
진리가 인간 밖에 객관적 형태로 존재한다고 믿는 면이나.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자기의 도(道)가 아닌 자기 밖의 도를 따라야 한다는 면 등은
기독교와 맥을 같이 한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김용옥 교수에게 도는 자연입니다.
자연(自然) - ‘스스로 그러함’인데, 그 안에 마땅히 인간이 따라야 할 길이 있다는 것이지요.
(자연이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점을 제외한다면)자연 안에 도가 있기는 하지요.
그러나 그 도는 엄연한 것으로, 인간의 밖에 거만하게 서있을 뿐입니다. 인간은 그 도를 얻기 위하여 그것을 향해 일로매진하여 날마다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원래 도란 획득하기가 어렵습니다. 도는 획득하여야 하는데 얻기는 어렵고, 그러니 나오는 것이 가식입니다. 바리새인이 되는 것이지요. 유교의 허례허식, 지나친 근엄함 내지는 경직됨은 행위로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나타나는 결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간혹 도를 깨우쳤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동양학에서 도의 획득은 순전히 자기의 노력의 결과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자기의 행위의 결과로 도를 얻기 때문에
거기엔 겸손이 있을 수 없습니다. 겸손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자기가 얼마나 겸손한지를 보이는 또 다른 형태의 교만인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는 차원의 진정한 겸손은 행위로 죄를 벗고자 하는 경우에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엔 사랑도 없습니다. 곤경에 빠진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은 있지만 목숨을 내어주며 자기를 미워하거나 자기가 도무지 품을 수 없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진정한 사랑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도란 것이 밖에 엄연하게 서있기만 하여 날마다 돌을 굴려올리지만 매번 실패하는 인간을 향하여 내려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만들어지기를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졌습니다.(이건 기독교 안에만 있는 진리가 아니라 모든 학문과 인간의 삶을 통해 이의 없이 증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을 살리는 사랑은 나를 위해 죽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친구를 위해 죽는 그런 사랑입니다. 친구를 위해 죽는 사랑은 진정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에서 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사랑과 겸손없이 도는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도는 몸소 우리를 찾아오신 도입니다.
원수되었던 우리를 스스로의 죽음을 통해 살려내신 사랑의 도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 생명이 넘쳐흐릅니다.
율법 앞에서 실패했고, 사랑이 위에서 내려와 나를 구원해 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겸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모르고서는 어찌 사랑과 겸손을 알 수 있을까요).
이렇게 하나님의 도를 조금씩 알아가면서 김용옥 교수의 도는 “초등학문”으로 보입니다(그가 알면 콧방귀도 아깝다고 할 정도로 제가 가소롭다고 하겠지만).
대학교 때부터 수십년을 혼신을 다해 진리 탐구를 했다는데, 그에게서 넘쳐나는 것은 좀 높게 말하면 자긍심, 나쁘게 말하자면 자기자랑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지식을 그렇게 열심히, 다방면적으로 다니며 설파하는데도 그에게서는 도무지 생명이 흐르는 것이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여전한 그 분의 열심을 보면서 순진함이 느껴져 귀엽다는(이 무슨 발칙한!)
생각은 들었습니다.
좀 옆으로 새는 말이긴 하지만, 마광수 교수가 텔레비전에 나와서 한 말이 화제인가 봅니다. 그는 공영 방송의 무슨 토론에 나와서, 사람은 예쁜 여자에게 끌리게 되어있다, 안 예쁜 여자들은 게으른 탓이다, 여자들이여 예뻐져라는 식의 말을 한 것 같고, 그런 그의 말에 사람들은 외모지향적인 천박한 인격의 소지자, 반 여성적인 사고, 인격수양이 안된 파렴치한 사람 등등으로 비판을 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마광수 교수는 김용옥 교수와 비슷한 순진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것에 끌리게 되어있지 않습니까?
마 광수 교수는 그 점에 있어서 엄청 솔직한 것이지요. 우리 인간의 죄 아래의 모습을
꿰뚫고 있고 그것을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교수인만치 그런 말을 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을 비판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되는데도- 얘기하고 있다는 면에서 그는 순진/순수합니다.
그의 문제는 외모 지상주의적 발언을 했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것에 일차적으로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죄로 보지 않는 다는 면에서, 그리고 그 죄 - 마광수 교수에게 많이 나타나 보이는- 로 인하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하는 탄식이 없다는 점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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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가 좀 현학적이지요? 실은 엊그제 어느 분한테 하나님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제가 그 분한테는 비이성적이고 비과학적인 사람으로 비쳤던 것 같아요. 저를 좀 멀리 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그런 느낌을 받자 마음이 쓸쓸해졌어요. 나 그렇게 이상한 사람 아닌데...하고 변명하고 싶은 마음을 “주님, 제가 그리심산을 선택하오니 기름 부어 주소서”하는 기도로 달랬습니다. 그리고 그 분한테 못다했던 말을 여기 큐티엠에 쏟아놓습니다. 그러니 제 현학적인 말, 너그러히 보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