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기를 빕니다. 특히 이번 주는 용기를 잃고 정신적으로 피해를 받고 있는 가난한 자에게 주님이 임하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찬양합니다. 혼동과 공허감 속에서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심에 슬픈 한 주가 되었고, 절대주권의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 또한 가난함이 싫었습니다. 어린 시절 친구들이 집에 오는 것이 싫었고, 서울에서 고시원 생활을 하면서, 고시원 쪽방에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이었기에 더욱 슬펐습니다. 제가 수험 생활을 하면서 늘 부러워했던 것은 3끼 식사를 마음 편하게 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길어지는 수험생활도 이런 가난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할아버지 시절부터 대물림되는 가난에 시달리고 있으며 쉽게 가시지 않습니다.
저처럼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 어린 시절부터 고된 노동을 해야 하는 아이들, 나이에 비해 늙어 보이는 얼굴들을 보면 괜히 마음이 짠해지곤 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해맑게 웃습니다. 저도 친구들 사이에서 성격이 좋은 친구 중의 한 사람으로 이야기를 듣곤 합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벗들로부터 보잘 것 없는 음식을 나누면서도 단 한 번도 지불하지 않았기에 기뻐했는지도 모릅니다. 누구도 다른 이의 몫과 자기 몫을 비교하면서 불퉁거리지 않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많은 것을 누리고 살면서도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의 부박한 삶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가난을 예찬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부유함을 선이라 말할 생각도 없습니다. 진짜 가난이란 물질의 결핍이 아니라 나눔에 인색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조금씩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사회적 소외와 아픔을 겪는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세상의 유혹에 빠져 물질적인 욕심에서 무능력한 인생으로 살아가야 했던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이 마음 놓고 울 수 있도록 품이 되어야 하고, 그들의 목소리가 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기도 해야 합니다. 이기적이고 자기만족적이며 피안적인 현실만 이야기하는 기독교는 사실 하나님 나라의 전진에 가장 큰 장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어린 시절의 가난이 가족 모두 기억 속에 각 다르게 기억 될 수 있는 삶일 것입니다. 이제 가장 가까운 가족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마음 놓고 울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참된 사랑 없이 여전히 가족 구원을 위해 요란스럽게 새벽기도, 철야기도 등으로 가족에게 이런다고 해서 달라지진 않았습니다. 삶은 여전히 힘겹습니다. 그렇다고 그 무게에 짓눌리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아직도 엄마와 동생의 다툼이 화해하지 않고 있습니다. 둘 다 각 교회를 다니는 데 서로 마음 놓고 울 수 있게 해주는 마음은 없나 봅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일어서게 해야 합니다. 홀로 잘 사는 꿈이 아니라 함께 잘 사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애쓸 때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는 데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주님의 초대에 오직 십자가를 따르는 삶으로 아멘amprsquo으로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