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린 건 내가 아니라 ...
작성자명 [박종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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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9.05.22
2009-05-22 출애굽기 21:12-27 ‘후린 건 내가 아니라...’
새벽 두 시, 빨리 올라가 샤워하고 자야겠다며
면허도 없는 내게 주차를 맡기고 먼저 올라가더니
훈련소에서 배달된 아들의 두 번째 편지를 읽으며
한참을 훌쩍거리고 나서 내 큐티까지 읽고 잠자리에 든 아내가
새벽 다섯 시에 포장 마차를 지키러 또 나갔습니다.
학교 측의 강력한 단속 요청으로
엊그제, 우리 옆의 마차 두 대가 실려 갔으니
다음은 우리 차례라, 마차를 지키려면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서로 가겠다고 우기다가 내가 져서 보내긴 보냈지만
참으로 황망한 씨추에이션이 아닐 수 없습니다.
포장 마차를 시작한 이후
내가 무슨 죄를 지어 이 고생을 해야 하느냐고
두어 번 볼 멘 소리를 한 적도 있긴 하지만
자고 일어나면 미안하다고 먼저 사과하곤 했습니다.
어제는 뜬금없이
중고등학교 시절 새벽 운동 얘기를 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는 것도 싫었지만
허술한 체육관의 추위는 정말 끔찍했다고
그래도 이를 악물고 던지고 또 던져서 그 자리에 올랐다고...
마차 지키러 나가는 일을 새벽 운동 정도로 생각하는 양
해야 할 일이라면 피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밝힘으로 오히려 나를 위로해주었습니다.
아내에게 면목 없고
아버지 앞에 죄 많은 인생입니다.
엄한 사람 후려다가 이 고생을 시키고 있으니...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후린 건 내가 아니라 아내였습니다.
25년 전 그때, 여직원 자선 커피숍 티켓 팔러
태평로 그 빌딩 25 층 우리 과에 올라오지만 않았더라면
그 걸음걸이가 조금이라도 세련됐거나
다른 여직원들처럼 화장이라도 곱게 했더라면
곤색 원피스의 에리가 그렇게 하얗게 빛나지만 않았더라도
내 눈을 후리지 못했을 겁니다.
아내가 훌쩍거리며 읽던
아들의 편지를 넘겨 받아 나도 읽으며
비로소 내 입술이 미소를 되찾고
마음까지 가벼워졌습니다.
누구 덕분에 이런 아들 얻었는데?
내게 고마워해야지, 암만...
누가 누구를 후렸든, 이미 우리는 서로에게
부족하나마 보상을 한 셈입니다.
이제 아버지 닮은 큰 사랑으로
주님이 가르쳐주신 십자가 그 사랑으로
보상을 마무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