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 22:16 ~ 21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기여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안타깝게도 우리 가족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자기들과 신학적ampmiddot신앙적 입장이 다르다고 하여 다른 교회(우리들교회)에 속한 목회자를 이단으로 지정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동생은 부모님의 피폐한 영혼의 바닥을 보고 있습니다.
추석에 발생 한 갈등은 그날 갑자기 생긴 갈등은 아니 였을 것입니다. 싸이고 쌓였던 서로 간의 작은 불씨가 큰 불을 일으키게 된 것이었을 테니깐 말입니다.
어린 나이에 동생은 유리 상자에 넣어 두고 전시 해 둬야 할 정도로 예뻤습니다. 그리고 항상 그 말은 유리 상자 공주라amprsquo는 수식어가 동생의 수식어처럼 따라 다렸고, 이런 동생의 외모에 부모님의 외모는 상대적으로 별 볼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수식어에 대비되어 저는 몸이 약한 보호 대상자amprsquo라는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이에 보호를 받고, 자란 저란 존재가동생은 아마도 눈엣가시였나 봅니다.
이처럼 몸이 약한 사람에게 세상은 아주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현재 개신교회 역시 장애인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비아냥과 저주를 퍼붓기도 합니다. 이런 소리를 들을 때면 자신이 태어나게 한 자식에 대하여태어난 것, 아니 태어나게 한 자체가 자신의 원죄라고 생각했을 부모님의 심정이 교회가 이단amprsquo이라는 표현으로 발현 되었나 봅니다. 배우지 못한 사람의 외마디 울림이였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자신이 늙어감에 앞으로 지켜줄 수 없는 자신들을 대신하여 보호amprsquo의 대상으로 여겨 달라는 외침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부모님이 자식이 양육한다는 것은 정말 큰 사랑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이것으로 크게 사랑하고 있구나라고 느껴야합니다. 잘 자랐기 때문입니다. 잘 자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선생님 혹은 목장으로서 사람을 양육하는 분은 자신이 얼마나 한명 한명을 위해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사랑 없이는 못하는 실천입니다.amprsquo 지금 서로 간의 으르렁 대는 가족을 보고 있을 때면 지금은 둘 다 목마른 때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우려되는 것은 동생, 부모님 모두 자신들의 세상에서 목마름의 갈증을 해결하고 있다는사실 입니다. 또한 제가 우상이 되지 않길 바랍니다. 미움의 대상amprsquo도 염려의 대상amprsquo도 아닌 우상화가 되어 오빠 때문에amprsquo,오빠를amprsquo이란 단어가 미움 다툼 시기 질투의 우상화에서 모두 버려지고 내려놓고 우리 모두가 화목하기 바랍니다.
역사의 나무에 핀 가장 아름다운 꽃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교회가 세상의 추문거리가 되었습니다.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데, 교회는 퇴행을 거듭합니다. ampldquo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amprdquo(계2:5b)던 주님의 말씀이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다른 이들은 몰락의 징후를 다 알고 있는데 오직 교회만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굳게 지켜야 할 것은 진리, 진실, 진정성amprsquo이지 우리 편이 아닙니다. 우리끼리 자화자찬하고, 우리끼리만 행복한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아닙니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셸은 말합니다.
ampldquo모든 전통적인 종교가 지니고 있는 고질병은 괴어 있어 썩는 것이다. 안착하여 기정사실이 되어버린 것은 무엇이거나 쉽게 부패할 수 있다. 신앙이 교조로 대치되고 자발성이 진부한 모방으로 바뀐다.amprdquo(아브라함 헤셸, 진리를 향한 열정,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1985년 3월 20일, p.77)
유교적인 가치관에서 자란 아버지 세대와 신식 교육을 받고 자란 우리 세대 간의 갈등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세대 간의 중심에서 예수님을 전도하고자 하는 것은 젊은 세대의 몫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2단,3단 ....을 외치는 사람이 되지 맙시다. 우리가족부터 되지 않길 소원합니다. 못 배워서 외침은 울부짖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울부짓고 있고, 동생은 그동안의 외롭움에 사랑을 갈구하니 어찌 골음이 생기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상처의 원인이 저라면 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옳고 그름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미안한 마음만 가지고 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저에게 자꾸 심판하여는 역할을 하려는 마음이 자리 잡습니다. 원인인 자과 판단을 하여 부모님은 너무 고집이 쎄고,동생은 이제 아집이 쎕다. 이것 또한 제가 내린 판단입니다. 어쩜. 저는 참으로 조율 하는 입장에 있어야 하는 것 자체가 2015. 쓰러지고 나서 자신의 몸 혼자 가눌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은 더욱 가슴 아프게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판단하다보니 머리를 아프게 합니다. 그리고 조율은 내가 하는게 아닌 주님께서 하는 것인데 자꾸 혼자 하려는 교만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추석 이후 타이네놀을 먹는 횟수가 자자지고 있을 때면, 내가 누구를 위해 걱정하고 있는 처지인지 입장을 생각할 수 밖에 없지만, 가정의 평화 복음을 생각할 때면 타이네놀이 정말 21세기 발명품 중에 하나임에는 분명합니다.
상상이 종종 현실이 됩니다. 바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바람, 소망의 바람, 구원의 확신의 바람이 가족의 평화와 사랑의 바람이 현실이 되길 소원합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혹은 우리 가운데서 행하신 일들을 치열하게 기억하는 일을 통해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한때우리 가족에게 행복의 신기루를 보여주면서 우리를 미혹했습니다. 그 신기루를 따라갈수록 삶은 고달파지고, 불안이 깊어집니다. 삶은 불안정하고 미래의 전망도 불투명하기에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맹렬하게 현실에 매달립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몸에 힘이 들어가고, 정신적 여백은 점점 사라집니다. 여백이 없기에 이웃들을 환대하지 못합니다. 이웃과의 따뜻한 교감이 없기에 외롭습니다. 존재의 망각에 빠지는 겁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족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다른 삶도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우리는 삶을 축제로 바꾸며 살아야 합니다. 자꾸만 우리 삶을 더 큰 지평 속에서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신명기서에서 우리가 자주 마주치는 단어가 있습니다. 기억하라amprsquo가 그것입니다. 신명기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종살이로부터 해방하신 것, 애굽에서 행하신 일, 광야에서 동행하신 일도 기억해야 하지만, 하나님을 격노하게 했던 일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기억하라는 단어는 그 기본 의미는 마음에 뿌리를 내리다amprsquo 혹은 새기다amprsquo입니다. 기억은 단순한 메모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기억은 망각에 저항하는 행위입니다. 우리 삶이 고달픈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가락에 실어 노래했습니다. 노래는 기억의 장치이기도 합니다.
우리가족이 이번 추석에 불행했던 추석으로 기억되는 것은 하나님의 그동안의 은혜를 망각한 것은 아닌지 주님께서 가족에게 주신 사랑을 생각해 보는 주가 되어 시를 작성해 보는 한 주가 되겠습니다.
목사님 주일 설교 말씀이 은혜의 말씀으로 다가왔음을 고백합니다.
건지산 한자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