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는 달라야합니다.
작성자명 [김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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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5.06.01
오늘 말씀은 세가지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이웃사랑과 자연사랑, 그리고 창조질서의 보존입니다.
우선 1-4절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치되는 구체적 내용입니다.
나밖에 모르고 남을 전혀 배려할 줄 모르는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도전되는 말씀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자고 아무리 매체에서 소리쳐도 점점 이기주의시대가 되어갑니다.
더군다나 모든 것이 풍족하다 보니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도 많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형제의 잃어버린 것을 못 본 체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보고도 안본 척하는 것입니다.
귀챦은 것이 싫습니다. 나만 잘먹고 잘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세상은 나 만의 개성과 자유를 부르짖지만, 교회는 우리 라는 공동체의 연합과 사랑을 강조합니다.
나는 형제의 어려움을 외면한 적이 없었나를 생각해봅니다. 고의적으로 봇 본 체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보고도, 도와줄 마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처지와 형편을 핑계로 못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 사무실에 잃어버린 성경책이 두 권있는데, 아직 주인을 찾아주지 못했습니다.
제 아내는 핸폰을 주웠는데 주인을 찾아주는 과정에서 전도대상자를 정했더라구요.
힘들어도 형제의 잃어버린 것을 힘써서 찾아주고 돌려주면, 투자한 것 이상의 기쁨이 있습니다.
6,7절은 어미새와 새끼나 알을 함께 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인간은 자연을 보호하고 유지시키며, 발전할 수 있도록 해야할 사명을 가지고 창조되었습니다.
그런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그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자연의 재해가 갈수록 늘고 있습니다.
문명과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얼마나 많은 자연이 훼손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동물이 몸에 좋다면 남아나질 않는답니다. 밀렵에 대한 방송을 보면서 분통이 터졌습니다.
저인망으로 작은 물고기까지 훑어버려 씨를 말리는 악덕어부들이 아직도 많다고 합니다.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창조시에 우리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 속담에 꿩먹고 알먹고 라는 것이 있는데, 이참에 바꿔야 겠습니다. 꿩먹던지 알먹던지 로요.
8절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를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명령하고 있습니다.
지붕에 난관을 만들어 사람들이 실족하여 떨어지지 않게 하라고 하십니다.
나편하자고 아무렇게나 집을 지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난관을 만들어야 합니다.
뚫린 입이라고 아무런 말이나 마구 쏟아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이에 대한 배려가 없습니다.
만약에라도 그 말로 인해 한 형제가 실족해 떨어졌다면, 그 피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하려는지...
내 말에도, 내 행동에도 난관세우기를 힘써야겠습니다. 작은 배려가 사람을 살리기도 합니다.
5, 9-12절은 장조질서를 보존하라고 하시는 주님의 명령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녀간의 의복을 바꾸어 입지말라고 하십니다. 하물며 동성애나 트렌스젠더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점점 더 보편화되고 있는 성정체성의 모호함으로 종말을 치닫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저들도 구원의 대상이어야 하고, 우리가 못 본 체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구원의 애통함으로, 잃어버린 것을 찾는 마음으로 다가가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두 종자를 섞어 뿌리거나, 소와 나귀를 같은 멍에로 묶어 밭을 갈거나, 섞어 짠것을 입지 말라십니다.
이것은 마땅히 구별되어야 할 성민 이스라엘이 이방과 혼잡될 수 없음을 예를 들어 보여주신 겁니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적용한답시고, 순모나 순면제품만을 고집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겉옷 네 귀에 옷술장식은 왜 안하시는 건지 물어 보고 싶습니다.
신앙의 가치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별된 삶을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자녀가 서울대가는 것과 성령받는 것중에서 어느 것이 좋습니까?라고 물으면 둘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것도 뿌리고 저것도 뿌려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한가지를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과 벨리알이 조화될 수 없습니다. 믿지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멜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의 총체적인 악은 불신결혼입니다. 그렇게 듣고 또 들어도 갈등과 욕심이 생깁니다.
선택은 곧 포기입니다. 둘 중에 한가지를 선택하기가 어렵습니다. 한가지를 포기하면 됩니다.
배가 파선합니다. 물건을 버려 배를 가볍게 해야 삽니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길이 하나밖에 없는 것이 축복중의 축복입니다.
새상과 뭔가는 다른 삶,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을 사는 방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