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팔복에 관한 것입니다.
5:1 왜 수많은 무리가 따를 때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셨을까?
5:2 왜 ampldquo입을 열어amprdquo 가르쳐 이르셨을까?
4:23절에 보면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무리 속에서 다녀야 할 때와 무리와 거기를 두고 산에 올라가 앉아야 하는 때가 있어야 하나 봅니다.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 앉으실 때 무리는 나아가지 않고 제자들만? 나아옵니다.
우리도 육일동안 세상에 두루 다니며 전도하다가 주일에 내 의지를 드려 교회로 올라가는 수고로움을 감내하고 주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갔을 때 ampldquo입을 열어amprdquo 가르치십니다.
왜 입을 열어 가르치셨다고 표현 했을까 궁금해서 성경앱에 검색해보니 입을 열어amprsquo 말하거나 전하는 표현이 많지 않기도 했고 예수님이 입을 열어 가르치셨다는 것은 이곳에만 나옵니다. 마 13:35에 보면 이는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시고요.
입을 열어 라는 표현이 들어간 성경구절들을 보니 그냥 말하고 전한다는 표현과 달리 부지중에나 그냥 말하는 것이 아니라본인의 확고한 의지로 말하고 전할 때 그런 표현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신 것도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자 하는 내용이 맞지만
창조주 하나님이 이 땅에 피조물인 인간의 형상으로 오셔서 로마의 핍박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구원해줄 구원자를 기다리고 모세의 율법만 따르고있는 기복적인 유대인들에게 진짜 강조해서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이 팔복에 관한 것이고 율법을 완전하게 하는 십계명의 참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작은 책의 권세 설교에서
예수 믿는다 하면서 온 집안 식구가 나만 보면 기분 나빠하기에 작은 책의 권세가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amprsquo하신 예가 저라고나 할까요.
그리고내가 아는 인봉된 내용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삶으로 보여주어야 한다.amprsquo가 제일 못하겠는게 저라고나 할까요?
말씀을 지식적으로만 알아 머리만 커져서 삶으로 살지는 못하고 머리로 정죄하고 입으로 가르쳐대니 나도 안 변하고 주변 사람들은 더욱 안 변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욕을 먹고 박해 받고 거짓으로 꾸민 악한 말을 듣는 것도 아니라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에 주리고 인정에 목말라 저를 지적하고 책망하는 소리에 즉각 옳소이다amprsquo 반응하지 못하고 분노하여 칼을 빼서 휘두르며 살았습니다. 교화 다니기 전이나 후나요. 그나마 교회를 다니며 말씀 듣고 공동체에서 나누다보니 한참 후에라도 자존심 상해 죽을 것 같아도 내가 잘 못했다고 안떨어지는 입을 열어 말하게 되었네요.
그러니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상처를 곱씹으며 미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제 설교(예언해야 하리라)를 들으며 어! 저거 난데...amprsquo 난 아직? 예언하지 못하겠구나!amprsquo 싶었네요.
7년을 예배로 나아가서 말씀을 듣고 있으면서도 굳세게 굳세게 기복을 원하는 저이고, 이혼하신 부모님이 말씀이 안들리는 것보다 물질이 없어 고생하시는 것이 더 가슴이 아프고 저도 물질이 없어 돕지 못하는 것이 슬픈 딸이더라구요.
목사님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이 바라크의 복, 예배하는 복이라 하셔도, 예배드릴 수 있어 좋긴 좋아도 이땅에서 해피엔딩이고 싶다며 만족하지 못해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못하고 깊은 우울에 허덕이며 자녀를 억지로 억지로 예배의 자리에 데리고는 다니나 온 몸으로 인생과 결혼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삶으로 보이고 있구나 깨달아지면서도 돌이키지 못하는 완악함이 있습니다.
어제 새로 개편된 목장의 목자님이 마침 저의 일대일양육 양육자님이시라 반갑기도 하고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한 내 모습 적나라하게 보이고 갈 생각하니 민망하기도 했습니다. 전화통화 할 때
아직 목원이냐? 간증도 했는데 부목자 아니었냐?amprsquo는 질문에 의연하게? 제가 뭐를 (적용)해서가아니라 못떠나게 하시려고 양육하시려 세우신거라고, (하라셔서) 울며 겨자먹기로 했다고 말했었는데
오늘 본문을 묵상하며 아직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과 내가 생각하고 바라는 복이 차이가 많이 나는구나 싶었어요. 그러면서 어제 목자님 말씀이 맴돌아 목장 편성표에서 같은 마을 목자님과 부목자님들, 마을님들, 초원님들의 새가족시절 사진을 검색하다가 적잖게 놀랐네요. 저보다 늦게 오신 분들도 부목자 목자 마을지기, 심지어 초원지기가 되시기도 했더라구요. 직분이 곧 믿음을 나타내지는 않더라도 뭔가 띵 맞은 것 같더라구요. 열심이 특심이 되어 으쌰으쌰 했던 저인데 말이죠. 열심도 내 열심으로 없애려 하다가 이도저도 내 함으로 할 수 없어 슬퍼하고 자포자기하여 무기력에 나를 맡기고 표류하며 시간을 낭비하는 벌을 받았네요. 그래서 오늘 말씀을 보며아래 말씀이 생각났네요.
마태복음 19장 [개역개정]
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저를 반면교사 삼으셔서 말씀 잘 들으시고 하나님 말씀과 공동체 처방에 순종하셔서 세월을 아끼시게 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