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실제 삶이 갈등할 때
작성자명 [김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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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5.05.31
하나님은 분명 일부일처제를 창조의 질서에 입각한 가정의 제도로 삼으셨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인간이 한 사람으로 만족하지 못해 여러 명의 아내를 두게된 것입니다.
일부다처제는 결단코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결혼제도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은 마치 그것을 인정하는 듯이, 일부다처를 전제로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이 본문을 근거로 일부다처를 허용해도 좋다고 해야 할까요?
성경은 우리 삶의 현실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삶과 동떨어진 이상향을 그려놓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안에서만 실천 가능한 유약한 것이 아닙니다.
100% 죄인들이 긴장과 속임과 배신으로 점철되어 살아가는 인간세상에서도 구체화되는 말씀입니다.
그 시대의 만연한 일부다처제도 때문에 더 큰 사회적 문제가 발생함에 대해 침묵하지 않습니다.
일부일처만 성경적 원리라고, 그렇지 못한 자들에 대해 원천적으로 정죄하거나 무시하지 않습니다.
부모에게 순종하고 효도하는 것이 십계명입니다. 불효하거나 패역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불효자들에 대한 처리 규정을 밝혀 놓고 있습니다.
이것이 불효자를 허용하거나, 불효자의 신분을 인정하는 성경적 근거로 사용하란 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삶을 구체적으로 터치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터부시되는 이야기를 그대로 오픈해 놓습니다.
거룩하고 경건한 종교적인 경전일 뿐만 아니라, 아더메치유 의 현장을 숨김없이 보여 줍니다.
그래서 성경을 날마다 묵상하면 우리의 삶이 변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부인을 두고 애첩을 얻었는데 아들까지 낳았습니다. 그러나 본부인의 아들이 장자입니다.
그럴 때, 자기의 감정에 쏠려서 첩의 아들에게 장자의 유산을 남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본부인에게서 난 첫아들이 자신의 기력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처음 것을 가장 귀하게 생각하십니다.
십일조라고 할 때 단순히 십분의 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 난(거둔) 가장 귀한 것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장자는 대단히 중요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질서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더 잘나고, 더 건강하고, 더 좋은 둘째 것, 세째 것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처음 난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부모 대에 왜곡되고 꼬여버린 것들이 자녀의 세대로 이어지질 원치 않았습니다.
부모에게 패역하는 자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말도, 엄마의 말도 듣지 않고 무시합니다. 그리고 방탕하여 술에 쩌려삽니다.
이런 아들을 둔 부모는 얼마나 마음이 힘들겠습니까? 그렇다고 그런 패역을 그냥 두지 말라십니다.
내 자식이니까, 숨기고 덮어두면 자기 가정만 망하는 것이 아니고 공동체가 무너집니다.
아무리 자식에 속썩여도 내 자식아닙니까? 그래서 두둔하고 편들어 주는 것이 부모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부모가 문제부모이고, 그런 부모 밑에 문제자녀가 나오게 됩니다.
자기 자식을 잡아서 성문에 데리고 가는 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자기 자식이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드러내는 것이 살리는 것입니다.
죄가 판명되어 사형에 처할 때는 그 성읍 모든 사람들이 돌로 쳐서 죽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가정에도 경고가 되게 합니다. 다른 자녀들이 경각심을 가지고 부모를 공경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공동체의 거룩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를 알게 하는 말씀입니다.
본문을 읽으며 내 아들을 생각하며 기도합니다. 눈물로 기도하지 못하는 저의 죄를 회개합니다.
아들에 대해 엄격하지 못한 면들이 많은데, 부모를 거역하면 좀더 엄격한 조처를 취해야 겠습니다.
그것이 제 아들을 제대로 사랑하는 방법임을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