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방져서...
작성자명 [순정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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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9.03.08
주님께서는
목자가 되는 길에도
정문으로 들어가야 하는 정통성을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목자의 정통성은 양의 문이 되신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의 부르심을 들었다해서 문이 절로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양의 문은
목자 스스로 열고 들어가는 문이 아니라
문지기가 열어 주어야만 들어 갈 수 있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문지기되신 성령님께서
양의 문을 열어 주시지 않으면
양과의 친밀한 관계는 성립될 수 없으며
따라서 각기 양들의 고유한 성향이나 기질을
파악하여 이름을 지어주어그 이름을 부르며 그 이름에
걸맞도록 양들을 인도해 낼 수 있는 능력도 부여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목자는 양과의 관계 이전에
성령님과의 친밀하고도 깊은 관계가
늘 선재되는 성령의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돌아보니 참 많이도
가르치는 입장에서 주님의 양무리들인
형제 자매님들에게 충고와 권면을 하며 살아 온 것 같습니다
물론 풍성한 말씀으로 서로 권면하라 는 바울님의
말씀대로 순종한 적도 있지만 대개는 말씀에 내 생각과 경험
그리고 내 이기적인 성향을 좇아 말한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주님께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바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타인의 음성이란 말씀을 하시므로
목자의 음성은 남의 음성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주시고 계십니다
간혹
나 자신은
진짜 들어야 할 목자의 음성을
내 맘에 부담이 된다거나 순종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그 음성을 남의 음성듣듯 타인의 목소리로 피해갈 때도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한 일주일전
젊은 여 집사님에게 권면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제 그 집사님을 심방하고 오신 분으로부터
내가 권면해준 말로 인하여 괴로워하며 내 권면이
옳지 않은 것 아니냐며 부인하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속에 말씀을 보니
문지기되신 성령님의 사역에 내가
얼마나 무심한 사람이 되여 성령님을 소외시킨채
내 열심으로 형제 자매님들의 맘 문을 열려고 했던지
정말 부끄럽고 챙피하고 얼굴 뜨뜻해져옴을 막을 길 없습니다
사실 주님의 부르심을
시시때때로 항시 듣는 자라면
양의 문이 열릴 때까지 성실과 인내와 기도로
문을 두드리며 기다리는 정당한 격식을 지닐 수 밖에 없게 되여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도
친히 우리들에게 본을 보인 자세입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기다리노니
누구든지 문을 여는 자는 나와 더불어 먹고 마시며
나는 그와 더불어 먹고 마시노라 는 말씀을 묵상해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말씀! 말씀! 말씀!
경계에 또 경계! 경계!하며
스스로 정통성의 한가운데로 나 스스로를
밀어 부치며 내 열심으로 폭격을 가하듯 폭탄같은 말씀을
신앙의 후배들에게 후다닥 떨어뜨리고 와선 나 자신을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여기며 자긍하며 살아 온 지난날들이 정말 한심스럽습니다
이 죄악을 어찌 다 상쇄시킬련지.....
이미 다 용서해주신 주님 한 분만으로
족해야되는데 아직도 그분이 잠잠히 있으라하면
잠잠히 있지 못하는 이 떠벌림의 원동력은 바로 내가
말씀을 안다는 인식에서 오는 대단한 교만인 것입니다
무릇 안다는 것이 모르게 되여 있는게 정상인데 말입니다
주님께서 시키시지도 않았는데
부르시지도 않았는데 말씀! 말씀!을 들먹이며
주님보다 앞질러가 말씀의 푹격을 가하는 이 어리석음!
이것을 멈추지 않고 계속 가다보면
먼 훗날 주님앞에서 주여! 주여!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했고 주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쳤는데 왜 당신은
나를 모른다 하나이까? 라고 발버둥치고도 남을 성향으로 변질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내 열심이 주님의 열심보다
앞지를 때는 양의 문 앞에서 인내와 성실과
기도로 문지기 되신 성령님께서 문 열어 줄 때까지 기다리는 단계를 생략하게 되여 있습니다
그 기다림의 단계를 생략하다보면 당연히
문이 되신 주님을 제껴놓고 담너머 혹은 다른 방법으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성역인 양 우리안에 들어가 제 성질 제 육질대로
행동하는 이 육질의 리더쉽은 이미 육질을 뛰어 넘은 영적 탐욕에 기인한 것입니다
내가 한없이 무식하고 건방지다보니
보이지않는 세계를 보는 양 얼마나 내 영적됨에
충천하여 무례한 행동을 저질르며 살아왔는지 이렇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십중반에 서서
그간을 돌아보며 살펴볼 때
남편과 나는 목회를 했으면 훨씬 더 어울리는 사람들이 아니였을까
싶을 정도로 목회의 현장에 깊이 참여할 수 밖에 없는 삶을 살아 온 것 같습니다
남편이 농학을 공부하다 두번씩이나
신학을 공부하다가도 목회가기를 주저한
이유는 주님의 부르심이 선명하지 않다는 것이였습니다
물론 계속 가다보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나나 남편이나 그분이 필요하여 부를 때 가도
충분히 늦지 않았다는 믿음의 소신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지금 처한 모든 상황에 자족한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 무엇을 더 추구하기엔 지금 해야할 일들도 산적해 있다는 것입니다
목자는 아무나 가는 길이 아닙니다
오죽하면 주님께서도 담너머 들어가는 자와
다른 방법으로 들어가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암시해주심으로
주님의 허락없이 목자의 길을 가는 자들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실까 싶습니다
더불어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그런 목자를
강도요 절도라고 칭하심으로 우리들에게 그들을 삼가라 말씀하시며
또한 그런 식으로 목자의 길을 가서는 안된다며 목자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내 작은 딸의 성향
역시 목자의 성향이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허나 그렇다하여 내가 그 아이에게
목회의 길을 가라는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비록 그 아이의 어머니일지라도 내 음성은 그 딸에게 타인의 음성일뿐입니다
곧 내 음성은 주님의 음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목자란 그렇게 진정 타인의 음성이
아닌 주님의 음성을 들은 자만이 가는 길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음성을 시시때때로 늘 듣고 지속적으로 인도 보호받는 목자만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성역인 양우리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문지기 되신 성령님과의
관계도 정립이 되여 그가 문을 열어 주실 때만 양 우리안에 들어가 양들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양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살다보니
내 성향만큼 나를 너머뜨리는 것은 없더라고요
끝까지 죽어지지 않는 나만이 아는 내 성향있어
오늘도 나는 내가 얼마나 건방진지 이렇게 큐티를 하면서도
건방진 훈육의 성향땜에 차라리 큐티를 올리지 않을 때도 있는 것입니다
다시한번
그간 인내와 성실로 문지기되신 성령님께 주목하지 못하고
나 스스로 나를 정통성 한가운데로 밀어 놓기 위해 말씀! 말씀!
경계에 또 경계!를 부르짖으며 스스로 목자인양 얼마나 말씀을
강조하며 성령님의 감동감화를 무시한채 살았는지 성령님께 용서를 구하는 바입니다
양의 문이 되신 주님과
양의 문지기 되신 성령님을 의지하기보담은
잘 알지도 못하는 말씀을 안다는 무식함에 젖어
내 생각의 문,내 경험의 문, 내 견해의 문, 내 신념의 문을 통해
주님의 가장 귀하고 귀한 거룩한 양들에게 내 음성을 들려준 적이
얼마나 많았었는지 다 아시는 성령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