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1-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17절)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내가 절제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는 용량이 부족합니다.
환자를 치료하고 나면 에너지가 방전됩니다.
물론 그 날 컨디션에 따라괜찮을 때도 있지만관계가 약한 저는 이렇게 되면 어느 누구와도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는 지경이 됩니다.
저는 시간이 부족합니다.
아침 시간에는 딸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오면 지각하기 전에 겨우 도착합니다. 그러니 선생님들과 얘기할 시간이 없습니다.
점심시간에는 낮잠을 자지 않으면 도저히 오후를 버틸 수가 없으므로 잠깐이라도 낮잠을 자는데 시간을 씁니다. 그러니 선생님들과 교류할 시간이 부족합니다.
일과를 마친 후에는 아이를 빨리 데리러 가야 하니 또 선생님들과 얘기 나눌 시간이 부족합니다.
제가 현재 하고 있는 일은
제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해서 치료실에 기여하는 것과 점심시간에 밥 먹으면서 애기를 잘 듣고 나누는 정도입니다.
어떤 사람은이런 저를다른 사람에게 시간을 나누어 주는 것에 인색한 사람이라고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스스로도 저 자신을 그렇게 정죄했기에 마음이괴로웠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위의 정황을 보면 이러한 해석이 맞기도 했지만 틀리기도 했습니다.
현재 육아에 매인 저의 상황과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받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육아로 인해 아침에 늦게 오는 것과 저녁에 일 마무리 짓자마자 빨리 가야 하는 것
그리고 점심시간에 잠을 자지 못하면심한 식곤증으로 환자들에게 피해를 주니잠을 자야 하는 것도
저의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저를 인색 하고 생각한다고 할지라도 개의치 않고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저 점심시간에 소통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삯꾼 목자와 거짓 선생들은 어떡하든 자기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서 자기 사람을 만들고 자기 이름을 드러내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자기 이름을 드러내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고 복음을 전하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저도 충분한 시간 선생님들과 교류하며 괜찮은 사람이라고 제 이름을 드러내며 인정받고 싶은데
그렇지 못하니 욕구 불만에 의한 괴로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고 싶은데 할 수 없는 상황이 저를 돌아보게 하며 불순한 목표를 새롭게 하시니 이또한하나님의 완벽한 세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적용으로 점심 먹으러 가는 길에 치료실 선생님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목장 예배 시간이라 생각하고
선생님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함께 식사하는 사람의 영적 필요는 무엇일까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