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소명
작성자명 [김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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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5.05.07
사도 바울은 주안에서 갇혔다고 합니다. 여러가지 의미로 다가옵니다.
먼저, 감옥에 갇힌 것 조차도 주님의 뜻 가운데서 이루졌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멋있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좋은 일만 주님의 뜻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일도 주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이런 의미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가둔 것은 감옥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과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스스로 붇잡혀 감옥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의 육신을 가두고 있는 것은 로마의 감옥이었지만, 그의 심령은 오직 복음에 매여있습니다.
저도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랑안에 갇힌 자되기를 원합니다. 스스로 매인 자, 종이 되기를 원합니다.
바로 이것이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그리스도가 구속하시고, 성령이 인치신 위대한 소명입니다.
내 한몸 잘먹고 잘살라고 부르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나를 부르신 목적이 있습니다.
2절부터 부르심에 합당한 행함이 무엇인지를 하나 하나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겸손과 온유, 오래참음과 사랑으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이 모두는 하나됨을 위해 필요합니다.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라는 큰 주제를 가진 서신서입니다.
교회는 하나됨이 중요합니다. 몸이 하나고, 성령도 하나고, 소망도 하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도 한분이시고, 믿음도 세례도 하나일뿐 아니라, 하나님도 한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되지 않으면 안될 절대적인 이유를 강조, 또 강조하시는 말씀으로 받습니다.
그런데 하나되지 못하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나의 죄악으로 인해, 나의 이기적인 욕심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되기 위해서 이런 덕목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먼저 겸손 입니다. 겸손은 자기의 위치를 정확하게 인정하는데서 시작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선 피조물이라는 인식입니다.
타인과의 관계에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지옥불에서 올라오는 교만을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교만때문에 하나됨이 깨집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이 교만을 없앨 수 있습니다. 자기가 100%죄인임을 인정할 때 가능합니다.
나는 겸손한 인간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밖으론 겸손해 보이는데(?), 속마음은 어떤지를 생각합니다.
두번째는 온유 입니다. 온유는 엄청난 힘이 일정한 방향으로 조절되어진 상태 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온유는 부드럽고 온화한 것을 의미합니다. 나약한 것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딱딱한 것은 부러지지만 부드러운 것은 휘기만 할 뿐입니다. 그러나 처세술로서의 온유는 아닙니다.
하나됨을 지키기 위한 온유입니다. 온유함이 없을 때 쉽게 폭발해버려서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세번째는 오래 참음 입니다. 인내라고 생각합니다. 인내는 소망을 품을 때 가능합니다.
원시치 못하는 자들은 참지 못합니다. 내일을 바라고, 영원을 소망할 때 오래 참을 수있습니다.
서로를 향해 오래 참음이 있어야 하나됨을 지킬 수 있습니다.
부부사이에도 오래 참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하물며 교회 공동체의 지체간이겠습니까?
변하지 않을 것같아도 세월이 지나면 모든 것은 변합니다. 변할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네번째는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 하는 것입니다. 용납은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서로 해야 합니다. 한 편에서만 죽자 사자 용납하면 나중에는 넘쳐버립니다.
그리고 사랑 가운데서 용납해야 합니다. 차곡 차곡 마음에 쌓아 두는 것을 용납이라 하지 않습니다.
참다 참다 한꺼번에 폭발하는 경우는 사랑 으로, 서로 용납하지 않았기에 그렇습니다.
저는 꽤 잘 참고 용납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회개합니다.
꾹 꾹 눌러두어서 언젠가는 폭발해 버렸던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이 아니고, 성품으로 하려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로 처리된 성품을 소원합니다.
여기에 한가지 더 필요한 것이 있는데, 곧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것이 평안의 매는 줄입니다.
평안의 매는 줄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영어번역엔 the bond of peace 라고 되어있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화평의 사람입니다. 우리를 화목하게 하시고 화목의 직분을 주셨습니다.
(사실 원문에는 화평, 화목, 평안, 평화 모두가 peace 입니다.)
이렇게 하나됨이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꼭 같아야 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7절은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고 하십니다.
여기 은혜는 사실 은사입니다. 선물의 분량대로 주셨다는 것은 각각 다르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믿음도 하나고, 소망도 하나고 몸도 하나이지만, 은사는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몸에 백체가 있듯이 너무나도 다양한 은사와 재능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다양성입니다.
좋은 교회, 건강한 교회는 다양함과 단일성이 조화를 이루는 교회입니다.
11절에 보면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로 주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습니다. 자기가 잘나서 사도가 되고 목사가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워주셨습니다. 은사가 이것밖에 없겠습니까? 교회안의 직분도 이것뿐이지 않습니다.
더 많은 은사와 직분이 있습니다. 너무나도 다양하고 서로 다른 몸의 지체같은 구성원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됨을 힘써 지켜야지요. 겸손하고 온유하고 용납하면서 지켜내야 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다양한 은혜의 선물을 주신 이유가 12절에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봉사의 일을 하게 합니다. 봉사보단 신앙인격이 먼저 온전해져야 합니다.
어찌하다 보니 설교문을 작성한 것 같습니다. 이것을 큐티나눔에다 올릴 수 있나 고민입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직분입니다. 그래서 겸손하기를 원합니다.
화목의 직분을 잘 감당하기를 원합니다. 성도들을 섬기고 세워가기를 소원합니다.
저의 작은 수고가 영광스러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온전히 세우는 일에 사용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