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55-12:8
“섬김의 미학”
때는 유월절을 엿새 남겨놓은 시절이었다. 주님께서 베다니에 오신다는 소식이 들리자 나사로의 집은 분주해졌다. 쌀을 씻고 전을 부쳤다. 얼마 전 오라버니를 무덤에서 살리신 주님을 환영하는 만찬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음식을 준비하는 일을 여전히 마르다의 차지였다. 그녀의 발걸음은 새털처럼 가벼웠다. 지지고 볶는 일이 이처럼 신명나는 일인지는 예전에는 몰랐다. 일전에 주님께 불평하며 마리아를 비난했던 모습은 그 어디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냥 좋았다. 그의 손놀림에는 감사가 넘쳤다.
잔치 한 복판에 주님이 계셨고 나사로도 주님 곁에 앉았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청년이었다. 주님 곁에 부활의 상징으로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주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닦았다. 일주일 후면 십자가에 달리실 주님을 향한 안타까운 몸짓이었다. 제자들이 흘려들었던 주님의 고난이 한 여인의 가슴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나드 향보다 더 진한 여인의 눈물이었다.
그때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제자들 중에서 회계업무를 맡고 있는 가룟 유다였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며 진 명분과 그럴듯한 논리로 여인의 행위를 나무랬다.
주님의 고난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의 시선은 물질을 향해 있었다. 이미 그는 상당수의 헌금을 편취하고 있었다. 주님을 통해 정치적으로 성공신화를 꿈꾸었던 제자들과 물질에 목숨을 건 가룟 유다가 별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다르게 생각하셨다. 효율과 합리성의 울타리 안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에게 타산적인 사랑은 전혀 사랑이 아님을 가르치신다. 주님께서는 넘쳐흐르는 마리아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으셨다.
우리는 유다가 취한 태도와 똑 같이 합리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종교적, 도덕적인 공리주의에 빠질 유혹을 늘 받는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효율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는 경쟁 사회의 논리가 교회 안까지 들어오는 안타까운 현실을 바라본다.
베다니에서의 마지막 만찬이 드려졌다.
만남의 기쁨을 넘어서 아름다운 작별을 위한 예배가 드려졌다. 주님의 십자가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사건이다. 전부를 주시기 위해 골고다로 향하신다. 그 길목에서 마리아 역시 자신의 전부를 드렸다.
이것이 사랑이다.
한 여인의 ‘거룩한 낭비’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신다. 오늘도 내게 기대하시는 ‘내가 드려야할 전부’를 계수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