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17-27
“아는 것과 믿는 것”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도 늘 한계상황을 설정해놓곤 한다. 말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면서도 이것은 안 될 거라는 이중적인 스탠스를 취할 때가 많다. 이미 베다니 사람들은 오병이어의 이적을 체험하였거나 수가성 이적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마르다와 예수님의 대화 속에는 부활의 소망도 엿볼 수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요한복음 11:23-24
그것은 아는 것이었다.
그녀는 내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을 말씀하신다.
부활은 미래의 찬가가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삶에 나타나야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머뭇거리는 그녀에게 자신을 폭로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요한복음 11:26-27
주님의 부활의 노래에 그녀는 즉시 아름다운 신앙고백으로 화답했다. 주님께서는 일전에 이 동일한 베드로의 고백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다. ‘주’로 시작된 고백이 ‘왕’ 되심을 인정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이심을 선포한 아름다운 노래이다.
지금까지 나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기 보다는 내가 애쓰고 끙끙거리며 안타까워했다. 막연한 기대감으로 주님께 차마 아뢰지 못하고 기대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분명한 목소리로 아뢸 때가 되었다.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구하라는 주님의 음성에 믿음으로 응답해야한다. 정직하게 나의 문제를 살피고 구체적으로 기도를 시작해야만 한다. 주님을 아는 자리에서 내려와 이제는 믿음의 자리로 나아간다. 삭개오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바로 나를 향한 부르심인 것을 이제야 눈치 채다니!
이러한 나의 무능함조차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는다.
나는 광야에서 주님을 만났다.
인생이라는 지독한 갈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제야 내 앞에서 생수의 잔을 들고 계시는 주님께 나아간다. 믿음의 진보가 더디고 주님의 호흡에 민감하지 못해서 날마다 엇박자를 양산하는 나를 주님께서 바라보신다. 아니라고 처절하게 주님을 부인하던 베드로가 내 자신임을 일러주셨다.
베드로를 향한 측은지심의 눈빛이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인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닭이 세 번 우는 새벽에 통곡으로 주님 앞에 눈물을 올려드린다.
불충하고 무능하지만 용기를 내어 부활의 노래를 부른다.
신앙은 내일과 함께 오늘을 사는 것임을 가슴에 새기며 하루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