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1-16
“기다리라”
이처럼 극단적일 수가 있을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적도 보았지만 안식일에 불쌍한 영혼을 고치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돌을 들어 치려는 무리가 있는가하면, 세례요한의 말이 기억나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도 있었다.
수전절 성전 솔로몬 행각에서 에워싼 무리들과 실랑이 끝에 자신을 돌로 치려는 자들을 피해 다시 요단 강 저편으로 가셨다.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이었다. 그곳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을 보자 세례요한이 외쳤던 음성이 들려왔다. 아무런 이적을 행하지 않았던 세례요한의 전도가 드디어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배척을 당해 등 떠밀리듯 도착한 땅에서 이들의 환영은 적지 않은 위로가 되셨을 것이다. 또한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곳이기에 초심으로 돌아갈 요지의 땅이기도 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외쳤다. 허공을 향하여 외쳤던 그 음성이 이년이 훨씬 지난 후에 그곳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관계전도가 대세라며 노방전도는 시대에 뒤떨어진 방법이라며 포기한다면 전도의 동력 하나를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불행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행복의 세계로 발을 내딛는 축제이다. 바로 그 기쁨과 부흥의 현장에 슬픈 소식이 들려왔다. 베다니의 한 청년의 병들어 죽게 되었다고 했다. 청년의 누이들은 예수님께 급하게 사람을 보내었다. 기별을 전하기 위하여 바쁘게 서둘렀을 것이다. 지금처럼 통신사정이 좋을 리 없었음에도 그들이 예수님께서 계신 곳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주님과 이 가정의 친밀함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주님의 태도는 그들과는 정반대이셨다. 생명이 경각에 달렸다는 소식을 들으셨음에도 그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셨다고 했다.
누이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낸 것이 바로 ‘기도’이다. 빨리 와서 고쳐달라는 간절함이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는 ‘기다리라’고 하신다.
한창 일할 나이에 젊은이가 죽었다는 소식은 온 동네의 슬픔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은 기쁨을 말씀하신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하셨다.
주님과 거리상으로 떨어져 있었던 이 사건이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셨을 때, 나사로가 죽게 되었더라면 아마도 누이들의 간청을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들과 제자들 그리고 베다니 사람들은 현재적 부활신앙에 대해 배울 기회가 없었다.
모든 이야기의 초점이 한 청년의 죽음에 맞추어져 있을 때, 주님께서 움직이셨다. 이방 땅에서 다시 유대 땅으로 들어가자고 했을 때, 제자들이 강력하게 만류하였다.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요한복음 11:8
예수님께서 다시 유대 땅을 밟는 것은 목숨을 건 여행이었다. 심지어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결연한 의지를 내보였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서 주님을 따르는 일보다 ‘기다리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더 어려울 때가 있다.
나의 삶을 돌아보아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으나, 조급증으로 얼마나 많은 일들을 그르쳤는지 모른다. 정지 신호를 무시하고 위험천만하게 달리는 자동차처럼 인내하지 못해서 많은 시간을 후회하기도 하였다.
우리들의 기도에 주님께서는 때로는 ‘기다리라’고 말씀하신다. 기도보다 늘 앞서는 우리들의 어리석음을 꾸짖으신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사무엘의 고백을 들으면서 하루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