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9:24-34
“한 가지 아는 것”
성전에서 구걸하던 자였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실로암에 가서 눈을 씻었을 때,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세상이 눈에 들어왔다. 보통 사람에겐 그냥 볼 수 있는 평범한 일이 그에게는 기적이었다. 자신의 삶에 들어온 빛을 경험한 그는 주님을 선지자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웠다. 그를 두 번이나 불러 묻고 또 물었다. 확인하고 또 확인했으나 그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 다만 그가 내 눈을 고친 것과 이 일이 하나님께서 하신일이라는 것이다. 그는 ‘한 가지 아는 것’을 증언했다. 이것이 전도이다.
그는 육신의 눈뿐만 아니라 영적인 눈으로 주님을 보게 되었다. 바리새인들의 거듭된 회유에도 그의 고백은 똑같았다. 그들의 이러한 시도에 대해 ‘이상하다’라고 했다. 오히려 ‘당신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느냐?’라며 반문했다.
심지어 그들은 부모를 불러 묻기까지 했다. 그들은 같이 기뻐해야했다. 불행했던 한 인생의 행복의 시작 앞에서 그들은 축하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안식일에 고쳤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 정죄하기에 급급했다.
시각장애인의 불행은 당사자 한 사람의 문제뿐만 아니었다. 열 달 동안 배 아파 낳은 자식이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부모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제자들처럼 ‘전생에 또는 내가 죄가 많아서’라는 자책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자식이 장성하면서 호구지책으로 걸인의 삶을 숙명처럼 받아드렸다. 무엇을 해도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불행했던 가정이었다. 자신들이 죽으면서 끝까지 염려해야할 거치지 않을 흑암이었다. 이 혼돈의 가정에 ‘빛이 있으라’고 명령하셨다.
확인하면 할수록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드러났다. 안식일에 고쳤다는 이유로 주님을 죄인으로 몰아간다. 기적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였으나 죄인인 주님께서 하신 일은 아닐 것이라고 윽박질렀다. 율법으로 무장한 그들의 시각은 한결같았다. 한 인생의 회복을 애써 외면하였다. 그리고 편견의 틀에 짜 맞추어진 법을 들먹였다.
율법의 완성은 정죄가 아니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사랑의 시그널이었다. 율법의 기초는 사랑이었다. 그럼에도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으려고 했다. 율법이 가리키는 주님을 보지 못한 영적 시각장애인이었다.
이사야가 탄식하며 외쳤다.
종교지도자들의 이런 열심을 향해 폭탄선언을 하셨다. 성전 뜰만 밟는 자들이라고 했다. 그들을 향해 더 열심히 율법을 지키라고 하지 않으셨다. 단지 오라고 하셨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 이사야 1:1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