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8:48-59
“너희가 영원을 아느냐?”
저들과의 대화는 끝을 향하여 치닫고 있었다. 유대인에게 사마리아인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모욕중의 모욕이었다. 그들의 분노는 주님을 사마리아인이라고 내몰았고, 심지어 귀신이 들렸다고 했다.
그럼에도 안간힘을 쓰셨다.
자신을 향해 돌을 든 자들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외면하시면 될 일이었다. 귀를 막고 소리치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땅의 것을 생각했다. 창조주께서 자신들 앞에 서셨으나 그들의 비뚤어진 시선은 주님을 귀신들렸다고 몰아붙였다. 왜곡을 넘어서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이 땅에서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주로 육체적 혈통이다. 지연과 학연이라는 배경이 없는 자들은 점점 설 땅이 좁아지고 있다.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고착화되면서 혈통이 삶의 조건 대부분을 결정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집안, 누구의 자녀로 태어나느냐가 중요한 세상이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고 계신다. 누구의 아들로 태어났느냐가 아니라 그의 영혼에 주님의 말씀을 담고 있느냐가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고 하신다.
얼마 전 서울대생이 인생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전두엽의 색깔이 아니라 수저 색깔에 따라 정해진다는 말을 남기고 자신이 살고 있던 옥탑 방 옥상에서 투신을 하였다. 안타까운 죽음으로 사회적으로 수저론이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1:12-13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결정되지 않는다고 하셨다. ‘오직’이라는 단어에 주목해보면 다른 길은 없다는 선언이 담겨있다. 성도가 걸어가는 길은 찾는 이가 적은 길이다. ‘외길 인생’이자 믿음으로 걸어가는 좁은 길이다.
논쟁의 한 복판에서 영원을 말씀하시자 그들은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며 역공을 해왔다. 그들의 한계였다. 주님을 보았지만 만나지 못했다. 주님과 논쟁을 벌였지만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은 좌편 강도였다.
그들을 향해 드디어 자신을 밝히셨다. 인간의 옷을 벗으셨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요한복음 8:56,58
이게 무슨 말인가?
자신의 신성을 대놓고 드러내셨다. 땅의 것만을 생각하는 자들에게 영원을 말씀하셨다. 영원 전부터 계신 자신을 폭로하셨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그들의 자긍심을 무너뜨렸다. 그들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그리고 내게 질문을 던지신다.
“너희가 영원을 아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