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8:37-47
“짝퉁 신앙”
우리는 먼 여행을 떠날 때 채비를 한다. 먹을 것과 입을 것 등을 꼼꼼하게 챙겨야 현지에서 어려움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비움의 나라이다. 오히려 이 땅의 것을 버려야만 들어가는 나라이다. 최종적으로 죽음이라는 비움을 통해 채워지는 나라이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상표를 붙이고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다고 하셨다. 영접하기는커녕 죽이려는 마음을 지적하신다.
목마르지 않는 나라, 어둠을 몰아내는 빛의 나라, 주님의 말이 거하는 나라를 선포하셨으나 그들은 오히려 돌을 들어 치려했다.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렸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규격에 맞는 메시야를 기다렸다. 또 다른 아론의 금송아지였다.
말씀으로 천지가 만들어졌음을 믿는다면서도,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자신들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지금 눈 앞에 서있는 메시야는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초월적인 존재를 믿는다면서도 상식이라는 틀로 가두었다. 저들의 이중 잣대가 바로 우리들의 실상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기도할때마다 하나님을 제한하는 어리석은 자가 바로 내 자신이다.
아이가 아프면 기도에 앞서 먼저 병원으로 달려간다. 목마르면 물을 찾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을 줄은 알면서도, 영혼이 파리하게 죽어가고 있는데도 아직은 살만하다고 우긴다. 세상을 기웃거리며 말씀을 애써 외면하며 살아간다.
그들은 이방인들을 지옥의 불쏘시개라고 믿었다. 마지막까지 놓지 않았던 자부심이었다. 혈통을 중시했던 그들을 향해 무늬만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주님의 지적은 참으로 뼈아팠다. 아브라함이라는 상표를 도용한 '짝퉁신앙'이라는 신랄한 지적에 그들의 반발은 당연하였다.
나 역시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에 취해 구원이라는 이름을 잊어버렸다. 본분을 잃어버린 신앙은 집을 나간 탕자이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학수고대하고 계신다. 주님의 시선은 집을 나간 동네어귀를 바라보고 계신다. 굶주려 돌아오는 ‘텅빈 영혼’을 기다리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다.
오늘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먼 여행을 마다하지 않으신다. 오죽하셨으면 너의 이름을 손바닥에 새기셨다고 하셨을까!
주님의 기다림을 기억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이사야 49:1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