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7:1-13
“그들은 믿지 않았다”
그들은 보고도 믿지 않았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통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이셨다. 자신이 생명의 떡이심을 가르치셨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떠나갔다고 했다. 주님의 손에서 끊임없이 떼어져 나오는 떡으로 배불렀음에도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체험이란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출애굽의 해방을 맛보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서 완악한 바로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한 사람의 완악함이 아니었다. 성도들을 무너뜨리려는 사단의 집요함을 보여준다.
끝내는 뒤쫓아 온 바로 군대 앞에서 그들은 원망을 시작하였다. 자신들을 가로막은 홍해는 죽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다를 가르시고 육지처럼 건너게 하셨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 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해석했다.
하나님의 짝사랑은 어제 오늘일이 아니었다. 신령한 반석이 이스라엘 백성을 따랐다고 하신다. 표준새번역은 ‘동반자인 신령한 바위’라고 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셨다. 그들의 불평 뒤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였다. 그들의 뒤치다꺼리를 마다하지 않으셨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먹으면서도 그들은 불평하였다. 바람이 불고 물벽이 쌓여진 홍해를 육지처럼 건넜다. 자신을 죽이려던 애굽 군사들이 수장당하는 현장을 목격하였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그들은 보았다. 그러나 삼일 길도 못가서 목마름에 원망하였다. 그들은 물을 마셨다. 땅에서 솟아난 물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반석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그들은 물에 취해 주님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온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였다. 그렇다면 그들은 원망대신 기도했어야 마땅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했다. 그러나 철딱서니 없는 그들은 실패하고 만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끊임없는 원망과 불평 릴레이를 보면서 어찌 이토록 은혜를 모르는 인간들이 있을까? 탄식조차 아깝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러나 이 일이 비단 이스라엘 백성들에 국한 된 일이겠는가? 우리의 일상사가 그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조금만 주의해 살펴보면 깨닫게 된다.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들을 가로막았던 죽음의 홍해를 건너게 하셨다. 자신의 육신을 찢어 지성소를 가로 막았던 휘장을 가르셨다. 살길을 여셨다. 믿는 자에게 영생의 길을 여셨다. 한 때는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배부르고 기쁨이 넘쳤다.
그러나 영원할 것만 같던 배부름이 멈추고 기쁨도 사라졌다. 구원은 이다음에 아주 먼 훗날 이루어지면 좋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바뀌었다. 현실 앞에 늘 연약해지고 위축되었다.
오늘 본문은 형제들조차 주님을 비아냥거렸다고 했다. 저들은 보았음에도 믿지 않았다. 들었음에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명절을 기해 만천하에 하나님 아들 되심을 나타내라고 종용했다. 설상가상으로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안팎으로 위협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주님은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기다리셨다.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말했다. 그리고 오늘 내게 말씀하신다.
"나를 보았기에 믿느냐? 보지 않고 나를 믿는 자가 복이 있도다." (요2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