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6:27-35
“믿는 것, 믿는 자”
길이 어긋났다.
생각이 달랐고 추구하는 목표가 달랐다. 대다수의 군중들은 정치적 메시야를 꿈꾸었다. 로마의 압제로부터 광복의 날을 그리워했다. 늘 배고픈 군중들에게 배부름보다 더 큰 이슈는 없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육신을 넘어서 영적인 세계로 초대하신다. 모든 민족을 넘어서 세상의 죄인들을 만나시길 원하셨다. 일시적 해갈이 아니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수가 되시길 원하셨다.
사람들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다녔다. 그들은 분주히 돌아다니며, 여러 척의 배를 동원하여 가버나움에서 가까스로 예수님을 만났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환영하지 않으셨다.
랍비에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그들은 의아했다. 분명히 산으로 떠나셨던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곳에 있으십니까?’라는 의문 안에 그들의 영적상태를 진단할 리트머스 시험지가 들어있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체험하였지만 그들은 여전히 주님을 한낱 선생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한 것이다.
그들의 이처럼 어긋난 시선은 주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세우고자 했다. 밤낮으로 열심히 찾아 다녔다. 그러나 이들의 열심은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할 뿐이었다. 헛수고였다.
“나는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가?”
이 질문은 나의 삶 속에서 순간순간 내밀어야하는 화두이어야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는 것인 양 포장하거나 속이지 말아야 한다. 하고자 하는 일에 주께서 함께하시길 원한다면, 열심을 내기에 앞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지 분별해야 한다. 더디더라도 주님의 뜻을 구하고 따르는 지혜가 필요한 이유이다.
주님의 일은 속도가 아니라 언제나 방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을 가버나움에서 찾았지만 만나지 못했다.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있었지만 그들은 주님과 함께 있지 못했다. 동상이몽이다. 여기에 슬픔이 있다.
그들의 분주함은 썩어질 것을 위한 열심이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주님의 마음으로 생각하고 주님의 뜻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임마누엘의 복은 결코 나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님을 명심하자. 주님은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지만 결코 가장 좋은 것만을 위해 계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못 박으셨다. 신뢰의 관계야말로 만남의 가장 필수 조건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향한 출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