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5:31-47
“곧 내게 대하여”
어제 수요기도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11시가 다 되었다. 씻고 텔레비전을 잠깐 보다보니 자정이 넘고 말았다. 서둘러 잠을 청했다. 그럼에도 새벽 4시 어김없이 눈이 떠진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말씀 앞에 앉았다. 오늘은 본문이 어려웠다. 도통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정리가 되질 않는다. 말씀을 접고 오랜만에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왔다. 어제 부족했던 잠을 보충하고자 이불을 덮고 잠을 청하는데 정신은 더욱 또렷해진다. 미뤄둔 말씀 묵상을 위해 수첩에 생각나는 대로 메모를 하였다.
오늘 말씀은 어제에 이어 자신을 향하여 돌을 든 자들에게 하신 권면이었다. 조목조목 비판의 날을 세우셨다. 성경을 상고하면서도 나를 보지 못하느냐고 안타까움을 토로하신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한복음 5:39
얼핏 생각나는 성경에서 만난 주님을 소개한다.
출애굽을 한 후, 홍해를 건넌다. 그것은 죽음으로부터 삶으로의 귀환이었다. 새로운 삶이 주어진 합동세례식이었다고 사도 바울이 해석했다. 그 후,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갈증에 시달리자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신다. 그 반석이 바로 그리스도이셨다. 인생이라는 광야에서 목말라하는 자들에게 생수가 되셨다. 사마리아 여인의 물동이를 버리게 만드신 그 생수였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나안을 향하여 걸어갔던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약속의 아들인 이삭은 그의 인생의 희망이었고 전부였다. 그 이삭을 죽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에서 십자가가 얼핏 보인다. 아브라함의 마음, 그리고 이삭이 모리아 산을 향하여 나뭇짐을 지고 걸어가는 모습에서 골고다를 향하여 힘겹게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홍해에서 세례를 받았다. 하나님의 눈물이었다. 반석에서 물을 마셨다. 그리고 광야학교에서 40년 동안 만나를 먹으면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님을 배웠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백성임을 가르치고 또 가르치셨다. 그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시라고 요한복음 1:1절에서 밝히신다. 예수님 때문에 사는 인생이 바로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다윗이 노래한 시편 23편은 목자이신 주님의 모습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그 목자에게서 아흔 아홉 마리 양들을 버려두고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향해 산 넘고 물을 건너시는 일편단심의 예수님의 사랑을 만난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도 함께 하셨고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신다. 효율을 선택하는 세상과는 달리 사람을 귀히 여기신다. 심지어 한 영혼을 천하보다 더 귀하다고까지 말씀하신다. 진정한 휴머니즘은 주님의 사랑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소중한 가치, 하나님 나라 가치관이다.
성경을 읽으면서 주님이 보이지 않는다면 편견에 사로잡혀 있거나 보아도 도무지 깨닫지 못한다면 그릇된 자기 확신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불행은 자신들이 만든 메시야 관에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들의 고정된 틀에 하나님 나라를 꿰어 맞추려고 했다. 또 다른 우상이었다.
내가 그랬다.
교회 나오라는 큰 누님의 권면에 예수님은 사생아라고 속으로 외쳤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예수님을 역사적 실존으로는 인정하였지만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과학이라는 고정관념에 갇혀 인정하기 어려웠다.
영원한 생명의 탐구는 지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영접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이다.
하나님의 은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