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1일 주일
요한복음 1:1-18
“태초에”
예수님과의 마지막 밤에 주님의 가슴에 안길만큼 각별한 요한이었다. 주님의 숨소리와 다정한 목소리를 들었다.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한 지난 삼년의 시간들 속에 그의 눈에 비친 예수님은 어떤 분이었을까?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그의 첫마디는 태초였다.
흔히들 사람을 소개할 때, 그 사람의 나이, 출신지 학력 배경 등을 말한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시작을 태초로 출발했다. 출신지 역시 태어난 베들레헴이 아니었다. 창세기의 태초보다 앞선 시간, 하나님 나라이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영원이란 시간으로의 초대이다.
빛이 있으라!
혼돈의 땅에 말씀이 들렸다. 그러자 빛이 생겨났다. 온 우주를 만드셨던 그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셨다고 했다. 하나님과 함께 있으셨다. 알고 보니 주님께서 바로 하나님이셨다. 요한은 새해를 빛 되신 주님으로 복음의 문을 열었다.
유력한 도시들이 불꽃축제로 한해의 시작을 알렸다. 그 화려한 불빛 속에 주님은 외로우시다. 진정한 빛이신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으나 아직도 세상은 주님을 알지 못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으나 어둠 속에 방황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넘쳐나고, 천만의 교세를 자랑하는 한국교회는 어둡다.
바벨론 땅에 포로였던 다니엘 시대처럼 로마의 속국이었다. 그 유대 땅은 선지자들의 예언이 그친 영적으로도 황폐한 땅이었다. 종교는 회칠한 무덤처럼 껍데기만 남아 있었다. 칠흑 같이 어두웠다. 창조 이전처럼 흑암 속에 갇힌 세상이었다.
모든 사람이 외면하였다. 어둠으로 충만한 세상에서 그때 그 빛을 증거하기 위해 한 사람이 있었다. 세례요한이다.
어둠을 깨는 목소리였다. 광야에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외쳤다. 그의 이러한 독설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왔다.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며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는 진기한 풍경이 생겨났다. 어둠 속에서 목말라 하며 갈증에 취했던 군중들이 몰려든 것이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사도요한은 세례요한을 소개했다. 그의 사명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목소리였다. 광야의 외치는 소리였다.
오늘 가짜 빛으로 가득한 광야 같은 세상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분명한 목소리로 말씀하시다.
침묵하지 마라.
외치라!
이보다 명확할 수 없다. 다니엘도 몰랐다. 모세도 먼발치에서 흠모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기대하며 기다렸던 시원한 답 하나를 말씀하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에 대해서 모든 수식어를 버리고 간결하게 말씀 하셨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예수님의 이름이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하셨다. 주님을 영접한다는 구체적인 사실이 바로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 지신 주님을 믿는 것이 되겠다. 이것이 은혜이다.
시온의 대로가 열렸다. 역설적으로 좁은 길이다.
다른 길은 없었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았다고 하셨다. 단 하나의 길을 말씀하시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고 하셨다.
세상에 수많은 종교가 있고 그들의 추구하는 바가 대략적으로 선을 행하고 죄악을 멀리하고자 노력하는 가상함은 있으나 어느 누구도 이처럼 명확하게 ‘내가 곧 길이라’고 선언한 사람은 인류 역사상 아무도 없었다.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 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 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김춘수 님의 꽃의 전문이다.
그랬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절망이란 단어를 새기며 죽어갔을 존재들이었다. 주님께서 나에게 ‘꽃’이 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영접한다는 것이 이처럼 ‘의미’ 있는 만남의 시작인 것이다.
세례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이 땅에 태어났다. 그럼에도 그의 증거가 의미심장하다.
“요한이 그에게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을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요한복음 1:15
세례요한과 사도요한의 증언이 일치한다. 세례요한은 주님을 가리켰다. 자기보다 앞선 분이라고 소개했다. 태초부터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천명한 것이다. 이것은 학습에 의한 깨달음이 아니었다. 주님께서 그의 손을 잡으셨을 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였다.
영원한 생명으로의 초대였다.
영접하는 자의 대표자를 고르라면 삭개오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주님께서 ‘삭개오야’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의 가슴에 맺혀있던 죄의 사슬이 풀어지자 토색한 것을 사배나 갚겠다고 고백했다. 자신의 재산을 팔아 절반을 가난한 이웃과 나누겠다고 하였다. 시켜서 한 일이 아니었다. 자발적 헌신이었다. 주님을 영접한 자의 삶의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그림이다.
삭개오가 노래한 것은 자신이 가진 지위가 아니었다. 재물도 아니었다. 자신의 삶으로 들어오신 임마누엘 주님을 기뻐했다. 이것은 표면적인 변화가 아니었다. 본질적인 번화가 시작된 것이다.
오늘 속박해왔던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추구하는 돈과 명예의 거추장스런 삶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예수님짜리’ 인생을 시작하는 새해가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