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을 가르킨 그 손가락
작성자명 [오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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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8.11.20
“… 이튿날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 ○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요 1:29-30)
“…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그 곳에 다시 서 있다가, ○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 하고 말하였다. ○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요 1:35-37)
“… 그는(칼 바르트) 항상 복음을 새로이 가리키는 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세례요한의 손 이상이 되길 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그가 하나님과 이웃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 나름대로 노력한 것을(신학) 나중의 사람들이 훨씬 더 잘해 주길 바랬다. …”
엘리야의 역활(말 4:5-6)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정교회(正敎會, Orthodox)들에서 세례요한의 손을 중요하게 여긴 것도 알고보면 비슷합니다. 그 손가락이 가르킨 곳에 항상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히 13:12-13). 오늘날의 정통이라 일컬어지는 칼바르트의 손은 지금 어디만큼을 가르킬까요?
(인 용 문:)…………제자직에로의 부르심(The Call to Discipleship)
성화란 역사적 정치적 현실을 떠난 개인들의 내적인 경건의 한 단계로 생각되기 쉽다. 그러나 바르트에게 있어서 신앙은 인간 사회의 현실을 떠난 개인적이고, 내적이고, 비현실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추상적이거나 일반적인 것이 아니며, 우주공간 속으로의 위험한 여행을 하려는 경솔한 신념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그분에 대한 복종을 포함한다. 즉 신앙이란 이론만이 아니라 실천을 요구하는 종합적인 것이다. 나를 따르라 가 예수가 인간들(men)을 그의 성도들(saints)로 만드시는 부르심의 실체(substance)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제자직의 복종이란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일반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복종을 의미한다. 이것은 본회퍼가 말하는 단순한 복종이다. 복종은 우리가 들은 것을 실천할 때 단순하다. 그 복종 이상도 그 이하도 다른 것도 아니다. 구체적으로 단순한 복종이란 자기 부정(self denial)과 예수를 믿는 신앙의 용감한 행위(brave act of faith in Jesus)이다. 그것은 느낌도, 생각도, 고려(consider)도, 명상도 아니고 단지 용감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예수에 대한 단순한 복종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파괴(break)를 일으킨다. 이 파괴는 복종하는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다. 이 부르심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계시되는데 그 나라는 이 세상의 나라들 가운데(among) 있지만 이 나라는 세상나라들과 대치하고, 모순되고, 반대한다. 즉 이것은 하나님의 쿠데타(coup de d etat)이다. 하나님의 쿠데타는 인간 예수의 실존 안에서 이미 선포되고 성취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깨뜨리시는 혁명이며 예수는 그들의 정복자(conqueror)이다. 정복자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그의 동료들 사이의 중보자요 신적 실재(divine reality)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증언해야 하는 그의 제자이다. 예수 안에서 되어진 하나님의 파괴는 [구체적인] 역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예수가 그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이유이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거짓된 절대들의 상대화에 관한 단순한 이론이나, 단순한 마음의 태도나, 내적 자유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의 제자가 될 때, 만약 우리에게 맡겨진(assume) 공적 책임(public responsibility)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잃어버리게 되고 영원한 구원도 위험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의 증언자로서 전혀 쓸모가 없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단지 조용히 참가하는 자는(quiet participant) 어느 누구도 공격하지 않겠지만, 그것은 그에게 요청되어진 복종역시 기피하는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복종은 반드시 공적으로 그의 주변세계에 대해서 불가피하게 공격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자굴 속에 있는 다니엘과 같이 그는 사자의 꼬리를 잡아당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견뎌야 할 것을 견뎌야 하며 부닥칠 것에 부닥쳐야 한다. 그를 전사(warrior)라고 묘사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전쟁(militia christi)이 일어나 다른 사람들에 의해 공격을 당하기도 하고, 추방되기도 한다. 우리는 그들과의 전투에서 이미 승리하였으며 그들의 힘은 이미 분쇄된 것이다. 세상의 폭력왕국에 대한 하나님의 나라의 대립은 원수 사랑의 계명 안에 나타났는데 이 사랑의 계명은 친구와 원수관계의 종식 즉 폭력사용의 종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화의 본질은 사랑에 있다.
결론적으로, 바르트에 의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육성된 권위들과 신성들에 대한 존경과 복종을 거부하며 옛세계와 싸워야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참된 하나님의 승리가 우리 가운데 이미 와 있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우정어린 행복한 공격이라고 말함으로써 비폭력적인 사랑의 삶을 주장하였다.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이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유 안에서 행동하는 삶이다. 그리고 이 삶은 개인의 내면으로 물러가는 정적주의가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책임을 다하는 공적인 행동 안에서 비로소 이루어진다. ……………
오늘날 비폭력 촛불저항도, 이 시대의 왜곡과 은폐를 지적했다면, 혹시 지금도 주님은 우리에게 “나를 따르라” 고 말씀하지 않을까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살아계신 주님은 항상 오늘 역사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