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15일 월요일
사사기 16:4-22
“기회의 시간”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한 1서 2:15-17
삼손은 기생을 보았고 눈에 들어오는 대로 행동했다. 인류의 역사에 죄가 침공해왔던 에덴동산이 그랬다. 하와는 눈에 들어온 보암직한 선악과를 따먹는다. 이 일을 사도요한은 안목의 정욕이라고 정의했다. 오늘도 사단의 전략은 집요하다. 그들은 정공법을 피해 여인의 마음을 돈으로 얻어낸다. 삼손의 치명적인 약점을 공략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처럼 끈질긴 들릴라의 요구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가 본대로 행동했던 눈이 뽑혔다. 안목의 정욕의 대가는 너무도 처참했다.
그가 들릴라 앞에서 고백한 그의 신앙고백이 나를 슬프게 한다.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어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 사사기 16:17
그는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라고 했다. 외형적으로는 그는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삶은 나실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늬만 나실인이었다. 이러한 신앙적 괴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현대판 나실인들의 종교생활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머리를 깍지 않은 것으로 나실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했다는 삼손처럼 주일성수, 봉사활동, 금연, 금주를 지켰다는 것으로 스스로 만족하고 있지는 않은 지 돌아보아야한다.
삼손은 여인의 간청에 괴로워했다.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고 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무릎에서 떠나지 못하고 은에 팔려가고 만다.
삼손의 실패는 주님의 성공과 대비된다.
죽음을 앞두신 주님께서는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누가복음 22:42
주님은 가롯 유다의 은 삼십에 팔리셨다. 오늘 삼손은 들릴라의 은 천백 개에 팔려갔다.
하나님의 사랑보다 세상 사랑을 구하느라 딤나로, 가사로, 소렉으로 방황하는 삼손의 발길은 결국 죄의 유혹에 무릎을 꿇게 되고 만다.
주님 역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으셨다. 번민의 자리에서 내려와 죽음을 피하실 수 있으셨음에도 자신의 뜻을 거두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골고다로 걸어가셨다.
유혹은 치명적이고 집요하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예외는 없다. 세상과 타협하고 사람을 먼저 의지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걸어갈지는 우리들의 몫이다.
삼손의 이야기는 잊혀 진 시간이 아니다. 과거라는 거울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라고 외치시는 주님의 음성이다.
오늘 나는 세상과 주님이라는 두 갈래 길에 서있다. 삼손이라는 이정표를 바라본다. 그리고 내일을 넘어서 모레를 가리킨 영원의 시간표를 따라 좁은 길을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