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12일 금요일
사사기 15:9-20
“고군분투”
기도조차 잃어버린 이스라엘이었다. ‘부르짖었다’는 단어가 사라졌다. 40년간 블레셋의 폭정에도 변변히 저항조차 못한 채 식민지 생활에 젖어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때 태양이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삼손’의 등장은 어두운 유다 땅을 비추는 한줄기 빛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오히려 삼손을 나무란다. 자신들의 구원자를 몰라보았고, 그를 결박하여 블레셋에 넘겨주고 만다.
빛으로 오신 주님이 보였다.
살았다고는 하나 사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위대한 신앙유산을 잃어버렸다. ‘삼손’을 제외하고는 모든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동화되어버렸다. 아니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이었고, ‘사사’라는 이름을 가졌던 삼손마저도 불신 결혼을 거리낌 없이 행할 정도였으니 당시 블레셋에게 점령당한 것은 나라뿐 만이 아니었다. 정신조차도 빼앗겨 버린 두말할 나위 없는 총체적 난국이었다.
저항조차 포기하고 연명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안타까움을 넘어서 분노를 자아내게 한다. 삼손을 잡기 위해서 삼천 명의 군사를 동원하는 이스라엘의 발 빠른 행동을 무엇으로 설명을 해야 할까?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에담 바위 틈에 내려가서 삼손에게 이르되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 하니” 사사기 15:11a
위기의 순간에 그들이 선택한 것은 문제를 일으킨 삼손을 붙잡는 일이었다. 그들은 가나안 정복 때 선봉에 섰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동족을 파는 일에 서슴없이 앞장서고 만다.
가롯 유다가 보였다.
우리는 해야 할일에 대해서는 민감하지 못하고 하지 않아야할 일에는 민첩하게 행동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오히려 그들은 삼손을 도와 블레셋으로 창끝을 겨누어야 했다.
동족으로부터 버림받는 다는 것은 슬픔을 넘어선 절망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삼손은 자신의 힘을 동족을 치는 데는 사용하지 않았다. 스스로 포박 당한 채, 블레셋에 넘겨진다. 억울하다고 항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갈이 그의 입을 열지 않았다.
어린 양이신 주님이 보였다.
사사기가 제기하는 문제 중 하나가 ‘자기의 소견대로 행동했다’는 것이다. ‘소견’이란 말을 국어사전은 “어떤 일이나 물건을 보고 느끼는 생각이나 의견”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관적인 자기 생각대로 행동했다는 것이다. 하와가 보암직도 한 선악과를 먹었던 것과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허물도 많고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삼손이었지만 동족에 의해 포박당한 채 그가 걸어갔던 그 길에서 주님을 만난다.
그리고 묻는다.
나실인으로 산다는 것,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묵상하며 하루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