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관찰
작성자명 [주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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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8.09.23
삼하13:15-22
다윗의 가정에 비극이 밀어닥치고 있다.
배다른 자식간에 근친상간이 일어났고,
연이은 사랑의 배신과 그에 따른 눈물...
그리고 복수를 결심하는 또 다른 아들과
이 모든 일에 탄식만 할 뿐, 속수무책인 아버지...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같지만
뿌려진 죄악의 씨앗에서 열매는 서서히 발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다윗의 탄식함을 보며
죄악의 힘이 무서운 이유중 하나가
영민하던 사고가 멈추어 버리고 캄캄한 절망속에 갇혀
어떻게 해야 할 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만든다는 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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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가 그의 말년에 쓴 책이 있다.
최근 홍성사에서 “헤아려 본 슬픔”으로 출판된 것이지만
내가 이 책을 처음 접했던 것은
95년 2월 즈음,
부산으로 가기 위하여 고속버스를 기다리던 동서울 터미널에서
‘두란노’서점이었던 것 같은데
그 곳에서 발견한 “슬픔의 관찰 / 원제 A Grief Observed”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당시 사회에 갓 진출한 초년병이었던 나는
세상에 대해 가지는 어설픈 두려움과
정리되지 못한 나의 청춘...
그리고 의지해 오던 가족과의 이별 등,
이 책의 제목에 마음을 빼앗길 이유는 많이 있었다.
6시간 흔들리는 버스를 타고 졸업식에 참석하러 가던 나는
책을 읽어나가며 점점 두 눈이 동그레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만 “사자와 마녀와 옷장”을 지은 엄청 재미있는 작가가 이런 글도 썼나 보구나
하고 집어들었을 뿐이었는데,
책의 초반부는 온통 하나님을 욕하고 있는 것이었다.
옥스퍼드대 교수였던 루이스는 59세에 처음 결혼을 한다.
그와 조이 그리샴의 로맨스는 워낙 유명하여
안소니 홉킨스와 데보라 윙거 주연의
영화 “쉐도우랜드 (shadow lands)”로 제작되어 나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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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죽었다...
워낙 결혼하기 전부터 암으로 6개월밖에 살지 못할 것을 알고 한 결혼이었지만,
은혜로 3년간을 연장받은 축복의 시간끝에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져버린 것이다.
// 슬픔은 게으른 것이라고 아무도 내게 말해 주지 않았다.
일상이 기계적으로 굴러가는 직장에서의 일을 제외하면
나는 최소한의 애쓰는 일도 하기 싫다.
글쓰기는 고사하고 편지 한장 읽는 것조차 버겁다. 수염깎는 일조차 하기 싫다.//
암논이 그랬을 것이다.
압살롬도 그랬을 것이다..
다말이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 다윗이 그랬을 것이다!!
아버지 다윗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다윗은 이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항변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가슴을 칠 수밖에 더 있었으랴...
그러나 그런 방면으로 너무나 착했던 루이스는...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게 항변한다.
// 장난감을 주고 가장 기뻐할 때 빼앗아 버리는 처사는
우주를 두고 생체실험을 하는 가학적인 신이거나
원숭이 수준밖에 되지 않는 저능아들이나 하는 처사이다!!!//
그는 그의 명저 “고통의 문제”에서
선하신 하나님이 왜 이 세상에 고통을 허락하시는지를 너무나 명징한 언어로
잘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현실속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를 데려가 버린 하나님께 대하여...
그는 그의 고통앞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는 울부짖었고 하나님을 욕하고 원망했다...
시간이 흐르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 내가 이때까지 하나님을 믿었노라고 하였지만...
진짜 의지하고 믿었던 것일까? //
사람이 진짜 자기 친구를 믿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으려면
아주 어려운 시간을 거쳐야 알 수 있는 법이라고 한다.
자신의 모든 재산과 아내와 자식까지 맡긴 채 어디론가 떠나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나는 과연 그 친구를 진짜 믿고 있는 것인지 시험무대에 오르는 것이다.
루이스는 생에 가장 귀중한 것을 요구당한 아브라함의 신앙을 떠올려 본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100세에 낳은 그의 아들 이삭을 달라고 하신다.
아브라함은 묵묵히 삼일 길을 걸어 그의 아들 이삭을 바쳤다.
그리고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그러나 루이스는 그것을 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모르셔서 그런 시험을 주신 것이 아니다.
다만 아브라함 자신이 자신의 믿음을 몰랐다.
하나님은 그가 자기 믿음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확증하기를 원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믿음이 하나님앞에서...
어떠한 것인지 스스로가 알기를 원하신다.
진짜로 믿고 있는 것인가?
어려운 일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어째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가?” 하나님께 항변한다.
그 항변을 하나님께서는 묵묵히 듣고 계신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의 상대이다.
사랑은 반드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지 않으면 할 수가 없다.
비록 상대가 ‘선악과’를 따먹어버리는 죄악을 저지르고
생명을 주신 창조주를 배신해 버릴 수 있다할지라도...
사랑은 상대에게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준다.
이 자유는 천사에게도 사단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다.
오로지 사랑의 상대자인 사람에게만 주어진 “자유의지”인 것이다.
이 자유를 가지고 일어난 비극...
그리고 그것을 뚫고 선을 선택하는 위대한 인간사!!
그 한가운데 우리는 던져져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자유를 가지고...
루이스는 하나님을 원망했고
니이체는 하나님은 죽었다 하였다.
그리고 프로이드는 무신론을 주장한다.
그들은 다 하나님을 알고 믿었던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자신을 향해
죽었다거나, 미쳤다거나, 없다고까지 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신다.
사랑은 자유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선하신 하나님께 항변하였던 것은 믿는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고대 근동에서 일어난 “영지주의”자들...
초대교회에 의하여 이단으로 정죄되었던 그들이 믿었던 신은
만약 선한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이렇게 부조화적인 세상일 리가 없다며
신의 내부에서 선과 악이 분열하는 현상이 일어났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신에 의해 이 세상이 창조되었다고 믿었다.
그 신의 이름이 메소포타미아 조로아스터교의 “아프락사스” 혹 짜라투스트라 이다.
이는 미치광이이자 장님인 신이었는데 선과 악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이 철학과 종교의 혼합사상인 영지주의가
초대 교회의 신앙에 흘러들어와
당시 널리 퍼지고 있던 기독교의 힘을 빌어 자신의 신조를 보편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요한 사도의 수제자였던 폴리갑 감독의 수제자
이레네우스 교부에 의하여 이 영지주의는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영지주의는 “영”은 순결한 것이고 “육”은 더러운 것으로 여겼는데
그 결과,
극단적인 “금욕주의”이거나 아니면
육체는 어떻게 하든 상관없다는 “쾌락주의” 양극단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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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는 계속 “슬픔을 관찰”해 나간다.
그의 “헤아려본 슬픔”은 그의 저작들 중에서 최고의 작으로 평가되어진다.
그것은 이론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선하신 하나님께서
이처럼 처절한 고통을 주신 이유를 자신의 삶가운데서
지독히도 정직한 발자취로 발견해 나가는 책이기 때문이다.
과연 그는 그의 명징한 이성과
학자다운 정직한 양심으로
이 모순되고 부조화된 세상에서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어떠한 결론으로 인도되어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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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두려워하던 일 중 하나가 이것이다.
그 고뇌와 한밤중의 미칠 것 같던 순간들은
자연적 과정을 거치면서 사라져 버리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이러한 무감각과 무미건조함이란 말인가?
왜 이 세상이 누추한 거리 같으냐고 묻지 않게 될 날이 올까?
그 너저분함을 정상으로 여기게 될 것이기 때문에?
슬픔은 결국 가벼운 구역질을 동반하는 권태로 빠져 들게 되는 것인가?
느낌, 느낌, 느낌뿐이로군.
대신 생각을 좀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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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속적인 행복에 기대지 말라고 경고를 받은 바 있었고,
스스로 그렇게 다짐하기도 했다.
우리는 심지어 고난겪을 것을 약속받은 처지 아니던가.
그것은 예정된 계획의 일부였으니까.
게다가 우리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라는 말을 듣기조차 하였으며,
나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미리 생각하고 계산해 보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물론 그것이 남이 아닌 나 자신에게,
그리고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렇다, 맞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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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우는 너무도 단순명료하다.
만약 내 집이 일격에 붕괴되어 버린다면 그것은 카드로 만든 집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들을 ‘계산에 넣고 있었던’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 상상일 뿐이다.
이들을 계산에 넣는 것은 진정한 공감이 아니다.
내가 만일 (내 생각처럼) 세상의 슬픔에 대해 진정으로 염려하였다면
나 자신에게 슬픔이 닥쳐왔을 때 이처럼 압도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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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 놀이를 하는 사람들은 게임에 돈을 걸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게임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분명 이와 같다.
하나님이든 아니든, 선한 신이든 우주의 가학적 신이든, 영생이든 비존재든,
그에게 아무것도 걸지 않으면 진지할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다가 판돈이 엄청나게 높아져 마침내는 가짜 돈이나 푼돈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진 모든 것을 내놓아야 할 순간이 되어서야
얼마나 진지하고 심각한 사태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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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극심한 고통만이 진실을 이끌어 낼 것이다.
오직 그러한 고통 아래에서만 그는 스스로 진실을 발견할 것이다.
만약 내 집이 카드로 만든 것이었다면 한방에 빨리 날려 보내는 것이 더 좋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오직 고난을 겪음으로써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주의 가학적인 신이나 생체 실험하는 신 따위는
불필요한 억측에 지나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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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학적인 신에 대한 생각들은 사상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증오의 표현에 가깝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괴로움에 찬 인간만이 얻을 수 있는 그런 쾌락
(반격하는데서 오는 쾌락)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그저 저잣거리에서 쓰는 악의에 찬 욕설 일 뿐이었다.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하나님께 말하는 것”은 그저 욕설일 뿐이었다.
물론 모든 욕설이 그렇듯이,
“내가 생각하는 것”이 곧 내가 참되다고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털어놓는 것은 하나님(과 그의 숭배자들)을 가장 욕되게 할 뿐이다.
이러한 종류의 욕설을 퍼부으면 모종의 쾌락을 느낀다.
‘가슴속 맺힌 것을 털어놓고’마는 것이다.
그러면 잠깐은 기분이 더 나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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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내 슬픔이 어떻게 발전해 가는지, 그래서 내가 어찌되든 무슨 상관이랴?
내가 그녀를 어떻게 기억하든,
내가 그녀를 기억하든 안하든 무슨 상관이랴?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녀가 과거에 겪었던 괴로움을 덜어주거나
더 무겁게 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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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것은, 이 문제에 관한한 선한 신이라 하더라도
가학적인 신과 마찬가지로 완고하기 짝이 없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치유하고자 고통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면 믿을수록,
자비를 구하는 일이 아무 소용없음을 더욱 더 믿지 않을 수 없다.
잔인한 사람이라면 뇌물을 주어 빌어 볼 수라도 있다.
스스로 자신의 사악한 놀이에 지칠 수도 있다.
잠깐이나마 자비심을 가질 수도 있다.
마치 술주정뱅이가 잠시 제정신이 드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맞대면하고 있는 이가
온전히 선한 의도를 가진 외과의사라고 한다면 어쩔 것인가.
그가 다정하고 양심적인 사람일수록, 더욱 무자비하게 썩은 살을 잘라 낼 것이다.
그가 우리의 애걸복걸에 꺾이고 만다면,
수술이 끝나기도 전에 그만둬 버린다면,
그때까지 겪은 고통은 아무 소용없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니 나는 그분이 두렵지 않아”라고 말하는데
이는 무슨 의미인가? 생전 치과에도 안가보았단 말인가?
어쨌든 이건 견딜 수 없이 괴롭다. 그러니 실없는 소리나 지껄이고 있다.
“그녀 대신에 고통을 감내할 수 있다면
아무리 어려운 일일지라도 어떠한 일일지라도 견디겠건만.”
그러나 이는 아무것도 걸지 않고 하는 말이기에 그 판돈이 얼마나 큰 지 알 수 없다.
만약 그 말이 갑작스레 실현된다면
그때 처음으로 우리가 얼마나 진지하게 그 말을 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 일이 허용되기나 할 것인가?
그런 일은 오직 한분에게만 허용되었다고 우리는 배웠으며
그렇게 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그분이 대신 행하셨음을 나는 다시금 믿는다.
그분은 우리의 실없는 소리에 이렇게 응답하신다.
“너희는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감히 그렇게 해서도 안된다.
나는 그리 할 수 있었으며 감히 감당하였다”
마지막...
그녀의 임종이 다다랐을 무렵 나는
“당신이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허락된다면, 내가 죽을 때도 내곁에 와 주오”라고 말했다.
그녀는 “‘허락된다면’이라고요!”라고 말했다.
“천국은 나를 붙잡지 않겠지요. 만약 지옥에서 날 붙잡는다면, 지옥을 박살 내 버리겠어요.”
그녀는 자신이 일종의 신화적 어법에
심지어는 희극적인 요소까지 곁들여 표현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눈은 물기와 더불어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의지는 어떤 느낌보다도 더 깊어서 그녀를 뚫고 비쳐 나오고 있었으며,
어떤 신화적 요소도 어떤 농담기도 없었다.
순수한 지성이 어떠한 것일지 이제 조금 덜 오해하게 된 정도이므로,
더 이상 그 경험에 휩쓸리는 일은 경계해야 한다.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든 간에 ‘육신의 부활’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알 수 없다. 가장 덜 아는 것이 최선인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마지막 계시가 지성에서 나오는 행위일지 사랑에서 비롯된 행위일지에 대해
사람들이 논쟁한 적이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는 또 다른 허무맹랑한 질문일 뿐이다.
비록 우리가 능히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죽은 자를 다시 불러온다는 것은
얼마나 사악한 짓이 될 것인가!
H는 내가 아닌 신부님(영국 성공회)에게 이처럼 말했다.
“저는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롭습니다.”
그녀는 미소 지었으나 그 미소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는 영원의 샘으로 돌아갔다.
Poi si torno`all eterna fontana.
; Poi si torno`all eterna fontana.
「신곡에서 단테는 그리워하던 베아트리체를 만나 신앞에까지 함께 갔으나
홀연히 베아트리체는 사라지고 그녀가 이미 영원의 자리,
즉 福者복자들의 반열에 올랐음을 통보받는다.
단테는 실망을 떨치고 베아트리체처럼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리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