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는 왜 하는데?
작성자명 [순정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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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8.07.05
어제 오후 5시경
헬퍼로부터 연락이 왔네요
경찰서에 있으니 좀 늦어질 것이라는........
울 작은 딸이
복음의 씨앗을 심고
또한 물을 주어 예수를 믿도록 도와 준 백인 청년인데
감사하게도 너무나 긴박하게 헬퍼가 필요할 때 그는 선득 나를 도와
몇개월째 울 가게에서 일을 하고 있는 중이네요
늘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오던 청년이
어제는 경찰 취조를 받느라 두시간 정도 늦게 왔는데
사연인즉 너무나 멋진 트럭이 주차장에 있어 그 트럭에 예수님을 믿으라는 멧세지로
페인트 해놓으면 그 멋진 트럭이 도로를 달릴 때마다 사람들이 그 멧세지를 볼 것이라는
생각에 그만 그리하다 차 주인에게 걸려 경찰에 넘겨졌다하네요
경찰에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작은 딸에게 잘 해결되여 빨리 풀려나게 기도하라고 부탁하니
엄마!
그 청년은 감옥에 가서도 예수님을 증거할텐데 뭘 걱정하세요 라며 되레 나를 책망하는
투로 말하네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감옥까지는 안갔지만 그가 자신을 취조하는 경찰에게
자기의 행위를 설명함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을 모습을 상상해보노라니 잠시 제 입가에
웃음을 번지는 것을 금할 수 없네요
동시에
자신을 취조하는 경찰에게
그 어떠한 것으로도 덧칠하지 않고
오직 사람들에게 주님을 알리고 싶고
믿게 하고픈 열정으로 투명하게 말할 수 있었다는게 몹시도 부럽네요
이 다음 주님앞에 가게 되면
우린 무엇이든 이렇게 다 자신들의 행위에 책임지고 설명해드려야 할 날이 올 것이예요
물론 그가 예의없이 무모하게 남의 차에다 그리 페인트칠 한 것은 잘했다고 볼 수 없지만 그렇게라도 주님을 증거하고팠던 그 순수를 나는 사고 싶습니다
작년 한해
어게인 평양 2007년을 그냥 보낼 수 없어 나는 두가지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한 십삼년전에 공연했던 마리아의 고백 이란 모노 드라마를 다시 한번 공연하는 것이였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평양 어게인 2007년을 기억하는가운데 창작 시 하나를 쓰는 것이였습니다
작년 겨울부터 가게를 둘을 하게 되여 좀처럼 틈이 안나는 상황속에서 그 둘은 다 쉽지 않은 것이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둘은 다 못하고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역사를 위해 시하나를 창작했는데
시평론가로부터 어찌나 심한 비평을 들었는지 허참~~~~~~~
내 시를 수정하기를 무척이나 원하더라고요
그래 나는 그렇게는 못하겠노라고
내 시의 터를
내 시의 심장을 나는 다른 것으로는 대체할 수 없노라고 그분께 메일을 띄워보냈네요
결국
내 시의 터와 심장은 그대로 올려지게 되었고
그렇게까지 신경전을 벌이면서 발표된 시인데도
나는 지금 아무리 그 시의 제목을 기억해내려해도 기억할 수 없게 되었네요
그렇게 그 시에 모든 것을 소진해놓고도
그것에 나를 붙들어 놓지 않는 이 홀가분함이
오히려 그것에 붙잡혀 사는 것보담 휠씬 더 성장과 성숙 성취를 향해 나아가는
자세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 시의 주제는 투명성을 겨냥하고 쓴 시로
최첨단 과학 문명으로 인해 도래하게 될 유비쿼터스 시대엔
투명한 사람만이 거리를 활보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누구나다
거짓말탐지기 #52850;을 부착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유비쿼터스 시대가 오면
투명지수가 가장 높은 사람이 가장 성공한 사람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시였지요
오늘
바울은 자신은 하나님의 동역자로
나는 하나님의 밭이고 하나님의 집이라는 텍스트로
내게 주시는 말씀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무엇이든 자주 봄으로서 느껴지는 친근함은
친근해지면 친근해질수록 점점 신비함은 사라지는 법인데
성경은 친근히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여전히 이전보다 더 신비로운 광휘로 빛나는 것은 왜일까요?
그리고
나는 그렇게 단단한 신비로 에둘린 말씀의 거리를 활보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해 준비해야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세상의 밭과 세상의 집이 아닌 하나님의 밭과 집은 저 천성과 같은 곳이 아닐까 싶습니다
계시록 21장에 보면 성곽이 벽옥으로 쌓이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같은 새 예루살렘성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것은 어린양을 위해 단장된 그리스도의 신부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벽옥은 투명한 돌을 뜻하며
맑은 유리처럼 완전한 투명성을 보여주고 있는 새 예루살렘 성의 정금은
불로 연단된 정금보다 더 귀한 금으로 신의 성품, 즉 하나님의 성품과
완전히 연합된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큐티를 왜 해야하는가?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바울의 텍스트를 놓고 보면
말씀의 불앞에서 내 본성과 죄성을 끊임없이 태우고 태워
내 자신의 신성한 투명도를 높이기 위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신 말씀이
곧 하나님 자신이라 믿고
그 믿음으로 말씀과 연합되어져 나아갈 때
벗겨지는 천연적인 나의 성품들과 기질들대신
위로부터 공급되어지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에 의해
새롭게 변화되어져가는 나를 얼마든지 확인하며 통찰해 나갈 수 있는 길이
바로 묵상의 길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착각은 자유지만
자유엔 분명한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모르는 철부지 아해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특히 하나님 자신인 말씀과 논쟁하는 자신의 어리석음은
아직도 젖을 먹는 유아상태라는 것을 바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자신은 단단한 밥을 먹는 신령한 자라는 착각에 빠져
고개를 쳐드는 내 모습이라니.................
꼴불견이지요
못난 소 엉덩이에 뿔이 있어
그저 받기 좋아하는...........
내 모습이라니.........
하루 이틀
십년 칠십년이 아닌
죽는 그 날 그 최후의 순간까지
내 정과 육을 대표하는 마음과 본성을 십자가에 못박으며 살아야한다는
그 단단한 고뇌의 밥을 없애버리면
십자가의 능력 또한 나타나지 않는 다는 걸 모르는바 아닌데도
여전히 나는 그 끈적 끈적 달짝지근한 부드러운 점액질의 유동액이라 할 수 있는
젖이 좋아 나의 구미에 맞도록 말씀을 재단해 나가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스도의 터위에
단순 견고하면서도
한없이 심오한 금이나 은이나 보석같은 신의 성품으로써의 말씀이 아닌
나무나 짚이나 풀처럼 인성에 가까운 사상이나 논리로 뒤엉킨 혼잡한 말씀으로
밭을 일구고 건물을 세운다면 그것이 어찌 불같은 시험들을 통과해 영구히 보호 보존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네요
그 끈질긴 자아의 성
본성의 성을 아담의 원죄 이후
오늘날까지 보존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끌어다 이리저리 손보며 그 옛날보다 더 화려하고도 튼실하게 오늘도
쌓아나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그것은 태워질 공력이라는 것을 바울을 통해 보게 되네요
그렇게 태워질 공력이 되여
수치로 가득찬 채
그 빈 몸
그 헐벗은 영혼그대로 그 투명한 거리를 활보해야 한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인 것입니다
나의 사랑
나의 자랑은 어디에 있을까요?
바울은
나의 사랑
나의 자랑을 불같은 시험을 통과하고도
여전히 남아있는 하나님의 밭. 하나님의 집들에 있으니
나도 어디 울 주님안에서
그분께서 허락하신다면
그런 목적을 두고 살아가보는 것이 소원이 되어지길 빌며...............